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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내가 좋다 Mar 04. 2024

나는 아직도 잘난 척이 하고 싶다

자존감 회복의 최단코스

   나의 인생이 180도 급커브를 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결혼식 1달 후부터였다.

유명작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방송작가 생활을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었던 나는

결혼 후에도 물론 나의 직업이 계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결혼이란 실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히 자발적인 의지로 추진한 결혼이라는 인생의 프로젝트는 시작과 동시에

나의 ‘의지’라는 것이 ‘상황’과 맞서 싸우기에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 절실하게 알려주었다.  


   허니문 베이비가 생긴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는데, 나에게는 ‘조산’이라는 위험이 찾아왔다.

임신 7개월 차부터 출산까지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했고, 집에서도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는 침대에서 기거하며

할 수 있다면 밥도 누워서 먹어보시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를 무한 책임감과 인내심으로 견뎌냈다. 그렇게 출산 당일…

무려 40시간의 진통을 견디며 산소호흡기를 꽂고 4명의 간호사 분들이 내 배를 눌러가며 그렇게 우리 딸과 만났다.

( 언제는 빨리 나올까 봐 문제라더니, 낳는 날은 그렇게나 안 나오다니…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우리 딸은 아주 특별한 개성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야경증’이라는 것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증상이다.

신생아실에서부터 아이가 잠을 잘 안 잔다며 수시로 젖을 물리라고 호출을 할 때부터 우리 딸은 그 상태였던 것 같은데,

아이는 원래 잘 자지 않는 것이려니… 어른들 말로 내가 너무 예민하게 아이를 키워서 그런 것이려니 무던하게 5년을 참았더니

그건 치료했어야 하는 증상이었다는 걸 아이가 5살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무지한 애미 같으니라고…

게다가 야경증을 치료한 이후에도 아이는 만성두드러기와 각종 호흡기 알레르기에 시달리느라 한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폐렴치료를 해야 하는

생활을 대략 3년 가까이 지속했다. 동네에 있던 야간진료소아과 선생님은 나의 상황을 긍휼히 여기셨는지 개인 번호를 알려주셨다.  언제든 전화하라고…

지금도 그 선생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우리 딸 잘 크게 도와주신 건 8할이 그분 덕분 같다.  


  그렇게 그럭저럭 7-8년 동안 밤낮으로 통잠을 자 본 적이 없이 생활을 하고 보니  

반페이지면 충분했던 건강검진 결과지가 어느새 두 장을 빼곡하게 채울 만큼 내 몸속의 사정은 복잡해져 있었고,   

사회적인 커리어는커녕,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아무에게도 가 닿지 못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만 하면서, 어찌 보면 큰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닌 얌전한 딸아이 하나 키우면 되는 평범한 생활인데,

왜 시간이 없고, 왜 힘이 들며, 어째서 프리랜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거지? 네가 너무 걱정이 많거나, 아이에게 집착하는 엄마인 것 아냐?

나의 전 직장동료들도, 나의 가족들도, 심지어 동종업을 하는 나의 남편조차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위축됐던 것 같다.

말을 할수록 나는 점점 더 게을러 보이고, 핑계만 대며 일을 미루는 사람으로 보이겠구나 하는 마음… 그것이었던 것 같다.

자신만만하게 내 결혼을 만들어 가겠다던 나는, 완벽하게 길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모르는 일이다.  의외의 곳에서 나는 다시금 길을 찾았다.

자취를 감췄던 나의 자존감을 되찾은 것은 소위 ‘맘충놀이’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무섭게 치솟는 서울 전셋값에 쫓겨 우리 가족은 신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뭐 그런 곳이었다. 나와 같은 엄마들이 너무나 많은 곳. 하루의 일과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일과에 따라 굴러갔다.

아이들을 등원시키면서 입구에서 만난 같은 반 엄마들은 그 길로 티타임을 시작한다.

커피와 빵, 쿠키 등 달달한 간식들로 당충전을 하며 수다를 떨다가 자연스럽게 점심 식사를 함께 하고,

아이들이 하원하면 아이들의 친구관계를 위해 함께 놀게 하자는 명목으로 모임 멤버의 집을 돌아가며 투어 한다.

당연히 아이들의 간식과 이른 저녁을 함께 나누면서 만들어 둔 반찬도 나누고, 좋다는 동화책이나 교구 정보도 나누고,

내일은 함께 아이들의 의류나 계절마다 필요한 생필품 등을 쇼핑하기 위해 쇼핑센스가 좋은 엄마를 끼워 약속을 잡는다.

베스트 드라이버 어머님이 멤버로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렇게 일주일이 금세 지나간다.  

말 그대로 나는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원에 보낸 후 하루 온종일 카페에 죽치고 앉아 남편욕, 시부모욕,  다른 아이 엄마 욕, 내 아이 칭찬 및 자랑을 늘어놓으며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똑같이 시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맘충모임’의 멤버가 된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라 했던 인간관계의 중심에 내가 앉아있었다.


   어째서였을까? 그때 나에게는 매일 똑같은 수다를 떨며 만나는 유모차 멤버의 그녀들이 무척 든든했다.

쫓기듯 안절부절못하고, 무엇인가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있는 듯한 불안에서 벗어나 서로 공감을 나누는 느낌이랄까.

나도 그녀들도 신입사원이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정 붙일 곳을 찾아 노력하듯이 그렇게 이 ‘맘충놀이’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하는 듯한 느낌.

그렇다. 나에게 그 시절 만났던 ‘맘충놀이’의 멤버들은  서로 ‘일로 만난 사이’들이었다.

사실, 한동안 ‘맘충’이라는 말이 있었을 뿐이지, 막상 그렇게 무분별한 아이 엄마들이 많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정말 ‘진상’인 일부 아이 엄마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대부분 카페에 유모차 끌고 앉아 계시는 어머님들은 그런 분들이 많지 않다.  나름의 규칙과 제한을 갖고 있지만, 목표가 ‘육아’에 한정적이다 보니 육아와 살림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양가 없는 수다로 보일 수도 있을 뿐이다.


   내가 그 모임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최단코스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건 바로 ‘잘난 척’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건 본능이라고 한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나의 ‘잘난 척’을 듣고 ‘재수 없어’가 아니라 ‘엄지 척’의 리액션을 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엄마들의 모임이 좋은 건, 결혼 전에 어떤 학벌에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얼마나 잘 나갔는지 등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똑같은 상황에서 만나는 모임이다 보니, 누구나 ‘잘난 척’할 수 있는 노하우가 하나쯤은 있었다.

그 어떤 것이어도 좋다.

멸치볶음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할 수 있는지, 동네 소아과에 대한 정보를 누가 더 잘 알고 있는지,

아이의 한글을 어떻게 하면 엄마가 가르쳐 줄 수 있는지, 부동산이나 주식을 얼마나 똑소리 나게 잘하고 있는지,

남편이나 시댁과의 소소한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등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다면  그들은 곧바로 ‘투 떰즈 업’을 마구 날려준다.

나의 잘난 척을 받아주고,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고, 자기에게도 가르쳐 달라고 해준다.

그것이 그 자리에서만 보여주는 예의상의 표현일지 몰라도, 아이엄마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한 개인에게는 꼭 필요한 성장과 격려의 시간일 수 있다.


  나의 경우 내 ‘잘난 척 필살기’는 책육아였다. 뭐 대단할 것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내가 책을 좋아한 관계로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물론, 아이가 수시로 자주 아파 밖에서 노는 시간보다 실내 놀이 시간이 훨씬 길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 더 컸지만

무한 인내심을 가지고 한 페이지에 한 줄 밖에 글이 없는 10장짜리 유아용 동화책 한 권을 매일밤 한 시간씩 한 달 넘게 반복해서 읽어주었더니

놀랍게도 우리 아이는 아무런 한글 공부 없이 4살에 바로 한글을 읽게 되었다.

( 저 정도 글밥의 유아용 그림책을 한 시간 동안 반복하려면 수 십 번을 읽어야만 한다. 그걸 30일 넘게 반복… 몇 번인지 계산해 보시길 )


  더구나 아이들은 놀랍게도 한 줄을 읽을 수 있게 되면, 한 장도 금세 읽어낸다.

나는 교육학자도 그 무엇도 아니지만, 책 읽기로 한글도, 영어도, 수학도 초등과정까지도 매우 만족스럽게 해결했다.

필요한 정보는 서점이나 인터넷을 몇 시간만 서치 해도 넘쳐나게 찾을 수 있다. 관건은 그중에 우리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맞는 것을 찾았다면 아주 가늘고 길~~~~~게 계속하면 되는데, 이게 제일 어렵다.

아마도 내 공부였다면 나는 못했을 것 같다. 새삼 우리 딸이 대단하고 감사하다.

여하튼 그렇게 우리 딸이 엄청난 뻥튀기 소식통과 함께, 동네에서는 ‘똑소리 차일드’로 떠오르면서

나는 경제활동은 아니지만, 다시금 사회생활을 하게 됐다.

모르는 어머니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고,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책꽂이에 무슨 책이 있는지 사진을 찍어가고,

등하원 길에 만나면 우리 딸에게 ‘넌 집에서 엄마가 뭐 가르쳐줘?‘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우울감에 찌들어 있다가 누군가 띄워주니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냥 친한 친구랑 수다를 떨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비슷한 공감대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서 서로 무엇인가를 배워가려고 하고, 그 와중에 내가 다소 우위에 있다는 약간의 잘난 척… 그 쾌감.

물론 아이의 공부 성적이 엄마의 인생 성적이 될 수 없다.

아니, 나의 인생에서 내 세울 것이 아이의 성적 말고 없다면 나 개인으로서는 너무 허무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 나에게는 그 ’ 허무한 잘난 척‘이 꼭 필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자존감을 되찾는 것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 무엇이든 남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내가 그것을 잘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가치 있는 것임을 확인할 때 자존감은 바로 되살아난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아기엄마로서의 삶에 적응하고 내 인생의 궤도를 마이너스 알파에서 플러스 알파로 방향전환하려면

반드시 ‘0’까지 올라와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0의 출발선’에 다시 설 수 있을 때까지 ‘시간과 기회와 격려’ 또한 필수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소위 ‘맘충‘들이란 ’ 서로 일로 만난 사이‘ 였고,

그녀들과 보낸 오전의 티타임은 입사 시에 받는 ‘오리엔테이션’ 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남들 보기에 ‘지들끼리 정신승리 하고 있는 쓸데없는 수다‘ 는 ’ 자존감을 회복하는 최단코스‘ 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한 2년 간 충분히 ‘맘충놀이’를 한 이후로 나는 엄마들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성장하고 내가 내 궤도를 찾은 후로 자연스럽게 내 생활에 몰두하게 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누구나 인정할 만한 명함을 갖진 못했지만, 지금 나는 나의 모습이 좋다.  
내가 가는 길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다. 아무도 모르는 길이라 해도 괜찮다.
나만 아는 길이더라도 나는 일단 갈 수 있지 않은가.

긴 인생에서 내가 걸어갈 통로를 찾아내고 여기에도 길이 있다고 남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기분도 꽤 괜찮을 것 같다.

그리하여 ‘맘충놀이’이건, 경제활동이건, 취미생활이건

내 인생에 대해서만큼은 내 마음껏 목소리를 내며  밉지 않게 ‘잘난 척’ 할 수 있는 인생이기만 하면

그 정도만 하면 나는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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