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6세기 동안 이탈리아에서나 다른 유럽 지역에서나, 여성들은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여성이 지성과 인격이 부족한 열등한 존재로서, 진정한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고 믿었다. 여성들은 요리, 청소, 육아 등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의무를 하도록 장려되었고, 심지어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은 행실이 음탕하고 불순한 여성들로 생각되었으며, 기혼녀들보다 사회에서 훨씬 낮은 지위에 있었다. 여성들은 미술 아카데미에도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극소수의 여성들이 화가인 아버지나 개인적인 교습을 통해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마저도 역사화나 종교화에 비하여 미술의 하위에 위치하는 초상화나 수채화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성 미술가들의 재능은 너무나 특출했다. 프로페르치아 데 로시는 그러한 미술가들 중 한 명이다. 그녀는 누구인가?
경이로운 씨앗 조각을 만든 여자 프로페르치아
그림 1) 데 로시 <그라시 가문의 문장>, 1510-30, 치비코 중세 박물관, 볼로냐
위 작품은 과일 씨앗에 새긴 정교하고 놀랄 만큼 세밀한 조각이다. 이 믿기 힘든 씨앗 조각의 주인공은 프로페르치아 데 로시 Properzia de’ Rossi 1490-1530이다. 볼로냐 도시 전체에 그녀의 이름을 알린 이 작품은 그라시 가문 Grassi family의 문장으로서, 조각이 된 11개의 복숭아 씨앗을 가진 특별한 은세공품이다.
11개의 씨앗 중 하나는 ‘자비의 마돈나 Madonna of mercy’이다.(그림 2) 마돈나의 활짝 펼친 망토 안에 100여 개의 아주 작은 얼굴들이 조각되어있는 미니어처 중의 미니어처이다. 그녀는 왜 대리석이 아닌 과일 씨앗에 조각을 한 것일까? 아마도 대리석 같은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재활용한 것 같다. 데 로시는 이러한 살구, 복숭아, 체리 등의 씨앗에 아주 복잡하고 세밀한 미니어처 작업을 하면서, 조각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했다.
성질이 매우 나쁜 여자, 혹은 성차별 사회의 희생자?
안타깝게도, 많은 다른 르네상스 여성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녀의 삶과 예술에 대해 매우 적은 사실만 알며 적은 수의 작품들만 볼 수 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소수의 조각 작품을 통해, 데 로시가 여성 예술가를 하찮게 여기던 당시 사회에서, 특히 남성이 지배하는 조각 예술에서, 그들을 능가하는 뛰어난 미술가였음을 알 수 있다.
데 로시에 대한 바사리의 전기 외에, 별다른 사료를 찾지 못하고 있던 미술사학자들은 우연히 볼로냐의 옛 범죄 기록 문서에서 그녀에 대한 예기치 못한 정보를 발견했다. 데 로시는 재판소에 두 번 출두했는데, 첫 번째는 이웃집 정원을 훼손시킨 죄로, 두 번째는 화가 아미코 아스페르티니의 집에 무단 침입하여 그의 얼굴에 물감을 던지고 눈을 할퀴는 폭행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여성이 조각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다가, 이러한 범죄 행위의 피의자였기 때문에, 당시 그녀는 체제에 대한 반항아, 혹은 말썽을 일으키는 골치 아픈 여자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당시 법정 기록에도 그녀가 성질이 매우 나쁜 여성이라고 적혀 있다.
그녀는 특히 동료 화가 아미코 아스페르티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의 명성을 시기하여 근거 없는 험담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여성이 인체 해부학에 능통한 것은 정숙하지 않고 방탕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데 로시가 해부학, 즉 남성의 육체에 대해 잘 아는 것은 그녀가 성적으로 난잡하며 행실이 좋지 못한 것을 증명한다며 비방하고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평판이 나빠져, 그녀의 작품들이 남성 미술가들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고 팔리게 된다. 바사리도 그녀의 작품이 아주 헐값에 팔렸다고 말했는데, 이는 아미코 아스페르티니가 그녀를 질투하여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스페르티니는 당시 볼로냐의 지도적인 화가들 중 하나였는데,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사회적으로 취약한 데 로시를 모함하고 나쁜 소문을 냈던 것이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폭행죄를 범한 것은 그녀의 성격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공평했던 사회적 상황과 능력 있는 여성 미술가를 질투하고 적대적이었던 남성 미술가들의 부당한 행동에 대한 분노로 볼 수 있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여성관을 갖고 있었던 볼로냐에서조차도, 여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부덕과 여성다움을 강요받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남성 미술가들이 이전보다 훨씬 향상된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인간적 자유를 누렸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데 로시에 대한 바사리의 전기 외에, 별다른 사료를 찾지 못하고 있던 미술사학자들은 우연히 볼로냐의 옛 범죄 기록 문서에서 그녀에 대한 예기치 못한 정보를 발견했다. 데 로시는 재판소에 두 번 출두했는데, 첫 번째는 이웃집 정원을 훼손시킨 죄로, 두 번째는 화가 아미코 아스페르티니의 집에 무단 침입하여 그의 얼굴에 물감을 던지고 눈을 할퀴는 폭행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여성이 조각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다가, 이러한 범죄 행위의 피의자였기 때문에, 당시 그녀는 체제에 대한 반항아, 혹은 말썽을 일으키는 골치 아픈 여자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당시 법정 기록에도 그녀가 성질이 매우 나쁜 여성이라고 적혀 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폭행죄를 범한 것은 그녀의 성격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공평했던 사회적 상황과 능력 있는 여성 미술가를 질투하고 적대적이었던 남성 미술가들의 부당한 행동에 대한 분노로 볼 수 있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여성관을 갖고 있었던 볼로냐에서조차도, 여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부덕과 여성다움을 강요받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남성 미술가들이 이전보다 훨씬 향상된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인간적 자유를 누렸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남자들은 여성 예술가들이 창의성과 천재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며, 공공 커미션은 뛰어난 창작 능력이 있는 남성 예술가들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완고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데 로시는 그녀를 질투하고 끌어내리려는 남성 경쟁자들과의 불화와 부당한 대우로 인해 평생을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녀는 그들로부터 혹독한 시달림을 받았고, 1530년 무렵에는 결국 모함으로 인한 명예 실추로, 모든 공공 작업에서 물러나야 했다.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재능이 충분히 꽃을 피울 수 없는 시대였다.
결국, 흑사병에 걸리고 무일푼으로 가까운 친구나 친척도 없이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명성을 들은 교황 클레멘트 7세가 그녀를 몹시 만나고 싶어할 정도로 전 이탈리아에 유명세를 떨쳤고, 한때 볼로냐 사람들에게 엄청난 찬양을 받았던 출중한 조각가였지만, 그 말로는 한없이 비참했다. 그녀가 금녀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