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의 한 큐레이터의 부인이 미술관을 둘러보고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여성 화가들은 어디에 있는 거죠?" 또, 한 여성 미술사학자는 "왜 여자 레오나르도나 여자 미켈란젤로가 탄생하지 못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뉴욕에서는 사나운 고릴라 가면을 쓴 여성 미술가 그룹 게릴라 걸스가 "여자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는가?"라고 쓴 포스터를 시내 곳곳에 붙이며 시위를 했다. 그동안 우리는 남자들로만 가득 채워진 미술사에 조금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남성 중심의 미술사의 무대 뒤에, 여성들에게는 너무 억울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 이 책은 바람처럼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의 뜻밖의 미술사를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쓴 것이다.
여성 소외의 역사는 비단 미술사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인간 사회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로 기록된다. 남자들은 정치가, 성직자,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 문학가로, 모든 분야에서 중심이 되었고, 여성들은 설사 재능 있더라도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회 체제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권위적인 남성 중심 사회, 여성의 성적 도구화, 모든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배제를 공고히 해왔다. 이러한 차별의 사회에서 문학, 과학, 미술 각 분야의 수많은 뛰어난 여성들이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여성 미술가나 과학자, 문학가도 각 분야에서 남성이 이룩한 최일류의 명성을 성취한 적이 거의 없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셸리의 부인 메리 셸리는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지만, 여자가 쓴 소설은 팔리지 않는다는 출판사의 권유로 이 소설을 익명으로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이 책은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10여 년 후 용기를 내어 그녀의 이름으로 다시 출간하자 여자의 작품이라 그런지 형편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구조 연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20세기의 여성 화학자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과학계에서도 아무리 뛰어난 여성이라도 그 능력을 인정받기 어려웠다. 결국, 그녀의 최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왓슨과 크릭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 노벨 의학상을 받았던 반면, 남성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를 도둑맞은 프랭클린은 37세에 무명으로 죽었다.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19세기까지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의과대학들에 여러 차례 지원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뉴욕의 제네바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녀가 입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스꽝스럽게도 여성의 입학에 대한 의과대학 남학생들의 찬반 투표의 결과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어차피 블랙웰의 입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난으로 찬성표를 던졌던 것이다. 입학 후에도 여자는 의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교수들과 남학생들의 비웃음과 따돌림 속에서 공부해야 했고, 졸업 후에는 그녀를 고용해주는 병원이 없어 스스로 무료 진료소를 열고 여성과 어린이를 위해 평생 헌신했다.
미술계의 현실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대체로 위대한 화가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위대한 조각가 하면 미켈란젤로를 떠올린다. 우리가 미술사에서 배운 미술가들도 거의 대부분이 남성 미술가들이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루벤스, 마네, 모네, 고흐, 피카소, 로댕. 그렇다면, 여성 미술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왜 미술사에서 사라졌을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예술적 능력과 창조성이 떨어지는 것인가? 1971년, 페미니스트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라는 글에서,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 피카소 같은 여성 미술가가 왜 탄생할 수 없었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보다 예술적 재능이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교육체제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린다 노클린의 주장은 페미니즘 논의가 비로소 미술계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성 미술가들은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배제되고 소외되어 왔다. 린다 노클린이 말했듯이,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가 만들어낸 성차별적 가치관 때문이다. 미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여성은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지는 회화나 조각 훈련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고, 자수나 공예 등의 가정용품이나 실용적 생산품, 혹은 꽃 그림 수채화 등의 분야에서만 작업해야 했다. 이러한 소규모 작품들은 감정적, 장식적, 아마추어적인 '여성의 영역'으로 취급받았다. 그리고 미술의 최상위 자리에 군림했던, 위대하고 영웅적인 미술 장르인 회화와 조각은 남성의 영역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여성의 작품들은 남성의 회화나 조각 작품에 비해 이류의, 혹은 열등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심지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나 앙겔리카 카우프만처럼 규모가 큰 영웅적인 역사화에 도전한 여성들조차 사후에는 미술사에서 재빨리 그 이름이 지워졌으며, 틴토레토의 딸인 마리에타 로부스티의 작품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았다. 더구나 여성 미술가들은 어머니, 가정주부로서의 결혼생활의 책무를 하면서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으로 인해, 동시대 남성 미술가들에 비해 작품 수가 적고 그 크기도 작았다. 그러나 미술사가들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출발선에 선 남성과 여성 미술가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작품 수와 크기, 사회제도, 장르 등 모든 면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는 남성 미술가들에게 특권을 부여해왔다.
사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훌륭한 여성 미술가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들 중 수많은 미술가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권력을 장악했던 미술계에서 그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기술을 가진 장인에 지나지 않았던 중세의 미술가 개념에서 천부적인 재능과 학식을 가진 존경받는 존재로 변모한 르네상스의 새로운 예술가상도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등한 존재로서, 예술에 있어서도 남성이 성취한 업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간혹 뛰어난 여성 미술가들이 등장하더라도, 그들은 예외적이며 특수한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최초의 미술 비평서인 바사리의 『가장 저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의 13명의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서술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남성 미술가가 타고난 천재적인 창조력을 가진 반면, 여성은 그저 성실함이라는 덕성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며 여성 미술가들을 폄하했다. 또한, 그는 여성 미술가들은 예외적인 존재이며, 작품의 크기가 크고 영웅적 역사화를 그리는 남성과 비교되는, 소소한 소재의 소규모 작품을 제작하는 열등한 존재라고 기술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당대의 대표적인 휴머니스트인 보카치오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여성을 선천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았고, 여성은 온순하고 정숙해야 하며 집안일에 능숙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믿기 어렵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여성관이었다. 이는 여성을 자연의 결점, 혹은 오류로 보았던 중세의 여성관의 연장이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도 이런 경향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18세기의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계몽주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근대 자본주의는 바깥일을 하는 남성과 가정을 돌보는 여성이라는 역할 분담을 공고히 했다. 또한, 인간의 이성과 과학 정신을 중시한 계몽주의는 남성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여성의 가치나 권리를 신장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루소는 여성들은 남성이 가진 지적 능력을 결여했으므로 공적 생활에서 떨어져, 가정에서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본분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성차별적 가치관이 여성 미술가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건축, 조각, 회화 등 위대한 미술은 남성만이 할 수 있으며, 여성에게는 초상화, 정물화, 자수, 공예 등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대부분의 여성은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고, 미술가의 필수 요건인 누드 데생도 배울 수 없었다.
예술가 지망생들은 화가나 조각가가 되기 위해, 전문적으로 기술을 연마하고 훈련해야만 했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같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10대 초부터 유명한 미술가의 작업장에서 수습 기간을 거쳤다. 그러나 당시의 정조 관념상 여성이 남자 미술가로부터 사적인 수업을 받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런 작업장에 접근할 수 없었고, 당연히 미술가로서의 훈련을 받기도 어려웠다. 이 작업장들이 후에 미술 교육 기관인 아카데미가 되었는데, 이 역시 남성들 위주로 운영되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유럽 도시에는 여성이 누드 데생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예술 길드나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까지 있었다.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부분의 여성 미술가들이 화가의 딸이거나 화가 집안 출신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작업실에서 미술 기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도, 여성 미술가들은 당대의 주류 남성 미술가와 밀접한 개인적 관계를 기반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네의 제수로서, 당시 인상주의의 수장이었던 마네의 예술적 영향과 후원을 받은 베르트 모리조와, 드가의 오랜 예술적 동료로서 그의 도움을 받은 메리 카삿의 경우가 그 예다. 이렇듯, 여성 미술가들은 열악한 미술적 환경에서 생존해야 했으며, 미술사에서 최일류의 위치에 기록되는 여성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가 높아지고, 미술계에서도 과거에 비해 여성 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하며, 그들의 작품들도 더 많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예술가의 작품들은 남성 예술가의 작품에 비해 덜 주목을 받고, 미술관들에서 덜 전시되며, 더 낮은 가격으로 팔린다. 미술시장에서의 양성 불평등을 조사한 한 리포트에 의하면, 현재 전 세계의 미술관 및 화랑에서의 남성 미술가 대 여성 미술가의 전시회 비율은 70 : 30이라고 한다.
미술사에서의 여성 소외에 대한 논의는 1985년 뉴욕에서 결성된 익명의 여성 미술가 그룹인 게릴라 걸스 (Guerrilla Girls)에 의해서 충격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불이 붙는다. 게릴라 걸스는 거리 활동을 하거나 시위를 할 때 흉측한 고릴라 가면을 쓰고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 미술사의 명저로 칭송받은 H.W. 잰슨의 <서양미술사(History of Art)>에서는 단 한 명의 여성 미술가의 이름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시 미술계의 현실이었다. 이러한 지적 때문에, 잰슨이 후에 몇몇 여성 미술가들을 자신의 저서에 끼워 넣을 정도로, 최근까지 미술계의 성차별은 심각했다. 하물며, 여성의 사회 활동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시대에, 여성들이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제약과 고난이 따랐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홀히 하고 전시에서 누락시킨 미술관들도 차별의 미술사에 있어 암묵의 협조자였다. 그러나 이제 페미니즘 미술가 및 미술사학자들의 움직임에 부응하여, 미술관들도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키오 궁에서 우피치를 거쳐 피티 궁까지 연결된 바사리 회랑(Vasri Corridor)에는 전시된 16세기에서 현재까지의 1700명의 유명한 미술가들의 자화상 중 단지 7%만이 여성 미술가들의 자화상인 이유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사리 회랑의 현실은 여성 미술가들이 전체 미술가의 7%만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활동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수십 년간, 세계의 유명 미술관들과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은 역사에서 그 이름이 자취를 감춘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발굴해내고 재평가하고 있다. 벨기에 앤트워프의 왕립미술관과 프라도 미술관은 17세기 정물화가 클라라 페테르스의 단독 전시회를 기획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2019년, 르네상스 여성 미술가 라비니아 폰타나와 앙귀솔라의 전시회도 가진 바 있다.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의 ‘여성 미술가 단체’와 협력하여 역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되찾아 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은 현대 여성 미술 관련 기획전에 주목해왔다. 또한, 젠틸레스키의 작품을 다수 수집, 소장한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는 2020년 4월, 그녀의 첫 대규모 회고전을 열 계획이다.
미술관들은 오랫동안 여성 미술가들의 존재를 숨기고 부정해왔다. 그러나 전통에 뿌리를 둔 진부하고 보수적인 미술관들은 지금 서서히 변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미국 영화계를 시작으로 전 세계의 문화예술계에 확산된 미투 운동은 미술계의 이러한 흐름에 다시 한번 기름을 붓고 있다. 세계의 주요 미술관들이 과거의 여성 미술가들의 기획전을 열어 대중에게 이들을 알리고 그들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미술사에서 이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 미술계에서는 여성 차별의 역사를 인식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훌륭한 여성 미술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재평가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1970년대 린다 노클린이 문제를 제기한 이래,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과 세계의 유명 미술관들을 중심으로 여성주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휘트니 채드윅의 <여성, 미술, 사회(Women, Art And Society)>나 게릴라 걸스의 <게릴라 걸스의 서양미술사> 등,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책도 몇 권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도 최근 여성주의 트렌드에 따라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책이 출판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르네상스에서 19,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태동까지의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려고 한다. 1970년대를 전후해 일어난 미술계의 페미니즘은 주로 이 시기의 미술사에서 잊힌 여성 미술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미술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 개념의 범주를 미술사에서 중심 역할을 해온 회화와 조각에서, 패션, 공예, 디자인 분야까지 확장하여, 이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예술가들도 포함시켜 서술해 보고자 한다. 르네상스 이래 시작된 회화, 조각과 공예, 자수, 장식미술 간의 위계질서는 여성을 미술의 주류에서 배제한 주요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가와 조각가뿐 아니라, 패션과 직물 디자인, 공예가, 정원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부문에서 탁월한 작품을 남긴 여성들이 미술사의 무대로 불려 올려질 것이다.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여성 문제와 여성 미술가들의 위치에 대한 담론이 더욱 활기차게 이루어지는 데 조그만 힘을 보태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여성 예술가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를 패러디한 게릴라 걸스의 포스터
이 재미있고 기발한 포스터는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 광고판에 붙여져 미술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시내버스 광고판에도 붙어 온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미술계에서의 양성 불평등 이슈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