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지 Oct 25. 2019

마리에타 로부스티

ㅡ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은  화가

■다음 글은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의 마리에타 로부스티 부분 중 일부 내용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 



마리에타 로부스티 Marietta Robusti 1560-1590는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화가 틴토레토 Tintoretto로 알려진 자코보 로부스티 Jacopo Robusti의 딸이다. 별칭인 틴토레토가 ‘염색공의 아들’이란 뜻이었기 때문에, 그녀도 ‘작은 염색공 소녀’라는 뜻의 라 틴토레타 la Tintoretta라고 불리기도 했다.



틴토레토의 비밀 병기는 그의 딸 마리에타?


그녀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다. 틴토레토의 전기 작가인 카를로 리돌피 Carlo Ridolfi가 쓴 『틴토레토의 일생』(1642년)과 피렌체 시인인 라파엘로 보르기니 Raffaello Borghini의 예술가들에 대한 전기 중 한 문단의 짧은 언급만이 우리에게 마리에타에 대한 정보를 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마리에타는 틴토레토의 일곱 자녀 중 장녀로, 남동생들인 도메니코 로부스티와 마르코 로부스티와 함께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조수로서 일했다. 틴토레토의 사후에는 아들인 도메니코가 작업장을 물려받았다. 당시의 화가들은 임금을 절약하고,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작업장에서 훈련을 받아 후에 자신의 작업장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들을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리돌피는 마리에타와 틴토레토가 보통의 부녀지간보다 훨씬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그녀가 15세까지 소년 같이 옷을 입고 아버지와 함께 그림을 주문받으러 유럽 곳곳을 다녔다고 기록하였다. 틴토레토는 재능이 뛰어난 마리에타를 자식들 중에서 가장 아꼈고, 아들들과 함께 드로잉과 채색을 가르치고 소년처럼 키웠다.


미술 신동이었던 마리에타는 일찍이 14세에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고,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너도나도 줄지어 그녀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였다. 심지어, 그녀의 초상화는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Felipe II의 관심을 끌어, 두 사람 모두 그녀를 궁정화가로 채용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틴토레토는 그녀와 공동 작업을 계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가 이 제안을 거절하도록 종용했다. 심지어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녀가 아버지 틴토레토의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부유한 베니스 금세공인 마리오 아우구스타와 결혼시켰을 정도였다. 틴토레토가 딸에게 얼마나 집착하고 의지했는가는 이러한 사실들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녀의 재능은 아버지의 가부장적 통제 아래 시들었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꽃 피울 기회를 잃게 되었다.    

  

만약에 그녀가 궁정화가로서 활동할 기회를 받아들였다면, 좀 더 성공적인 화가로서 미술사에 그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가부장 체제의 사회에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스스로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자유가 없었고, 마리에타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아버지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마리에타가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는 15년 동안, 그녀는 수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고 화가로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틴토레토는 그녀가 예술가로서 경력을 확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30세가 될 때까지 결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틴토레토는 이렇듯 딸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마리에타는 아이를 낳다가 30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4년 후 틴토레토도 사망했는데,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딸의 죽음으로 그가 너무 상심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한다.


한편, 마리에타가 사망한 후 4년간 틴토레토의 창작 능력 역시  슬픔으로 인해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미술가 그룹인 게릴라 걸스는 그가 슬픔 때문에 의욕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의 비밀 병기를 잃어 작업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창작력이 쇠퇴한 것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한다.    


    

<자화상>, 1580. 캔버스에 유채, 93.5 x 91.5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소년과 함께 있는 노인의 초상>, 1585, 캔버스에 유채, 103 x 83 cm, 빈 미술사 박물관, 빈
<두 남자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99.5 x 121 cm, 드레스덴 미술관, 드레스덴


<오타비오 스트라다의 초상>, 1567-68, 리크스 뮤지엄, 암스테르담

                                   

<젊은 여인과 개>, 16세기, 치니 컬렉션, 베네치아

                                                  

<베네치아 여인>,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그녀의 재능과 명성도 16세기 당시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그녀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 틴토레토나 다른 미술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 연구를 한다면, 언젠가 르네상스 미술사에서의 그녀의 위치도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은 이러한 숨겨지고, 잊히고, 왜곡된 여성 미술가들을 찾아내어, 날개 꺾인 여성들의 미술사를 다시 쓰려고 하고 있다.

이전 02화 프로페르치아 데 로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