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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Mar 16. 2020

누가 '이태원 클라쓰'를 까대는가

ㅡ 권선징악과 판타지의 충족

드라마 클래식의 기본 구조

ㅡ 권선징악과 판타지의 충족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다음 웹툰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누적 조회수 2억 뷰 이상, 누적 구독자수 1300만 명을 기록했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때문인지, 드라마 역시 첫 방송에서 5.0%의 시청률로 출발하더니 최근  14.8%까지 기록해 좋은 흥행 적을 보이고 있다. 명확한 권선징악 서사의 탄탄한 스토리에 노련한 연출, 톡톡 튀는 개성 있는 캐릭터,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휘하는 배우들의 연기력, 이런 것들이  케미를 이루며,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웹툰과 드라마로 제작된  <이태원 클라쓰>  출처 namuwiki & Wikipedia



너도나도 스펙과 금수저를 논하는 이 사회에서, 고아에다 고교 중퇴자, 전과자인, 그러나  아무나 갖지 못한 살아있는 눈빛을 가진 짧은 밤톨머리 남자 박새로이, 소시오패스 조이서, 고아 출신의 입지전적인 여자 오수아, 트랜스젠더 요리사 마현이, 아프리카 혼혈인 토니, 조폭 출신 전과자 최승권, 모두 사회적 소외계층의 인물이다. 이들이 똘똘 뭉쳐 사악한 재벌 권력 장대희에게 멋지게 복수한다는 서사는 우리가 너무도 익숙한 드라마의 클래식이다. 이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가 되풀이되는 것은  백설공주, 신데렐라 같은 동화가 계속 드라마와 영화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플롯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소망들, 명확한 권선징악, 악인의 멸망, 약한 자들의 승리와 해피 엔딩에 대한 판타지를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충족시킨다. TV 요리 배틀 프로그램인 최강포차 우승으로 100억이라는 어머어마한 돈을 투자받고 제법 큰 기업으로 성장하며 원수  장대희 회장을 압박해가는 I.C의 모습은 답답하게 꽉 막힌 현실에서 좌절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뻥' 뚫어준다. 이른바 대리만족이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로 밝혀진 후 패닉에 빠진 마현이에게 용기를 주는 '나는 단단한 돌덩이. 검은 어둠 속에 가둬 봐라. 나는 홀로 빛나는 돌덩이. 나는 다이아몬드'라는 시의 구절은 우리 사회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상처 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준다.


한편, 죽음을 코 앞에 두고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 회장은 “빌어먹고, 고개 숙이고, 배신하고, 내치고, 빼앗고, 짓밟으면서 장가, 내가 이뤘어!”라고 광기인 듯, 서글픈 듯, 허무한 듯 혼잣말을 한다. 강력한 악의 상징과도 같았던 한 인간의 나약하게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죽지 말라는 박새로이의 전화 목소리에, "내가 살기를 바라는 유일한 사람이 네 놈이라니...오래 못 기다린다... 빨리 오너라."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애증에 얽힌 복잡한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깔아놓는다. 이 드라마의 선악 구조는 비교적 선명하지만, 선함과 악함의 본질에 대해 단색의 톤이 아닌 복합적인 색깔을 입힘으로써, 드라마의 깊이를 보탠다. 악인에게 느끼는 혐오감과 미움의 한편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연민의 감정마저 일으킨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딴지를 거는 이들이 있다. 박새로이 같이 살면 인생 종친다는 둥, 조이서 같이 능력 있고 스마트한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모양새가 역겹다는 등등. 드라마를 보고 박새로이 같이 살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걱정하는 것일까, 이 험한 풍진 세상에서 그렇게 살면 망한다며 전투 자세를 다잡는 것일까. 드라마는 드라마다. 우리는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하다.


조이서의 캐릭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만 예단하는 것도 그렇다. 왜 똑똑한 여자가 오로지 박새로이에게 모든 것을 건 채 자신의 길을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똑똑한 여자는 사랑에 올인하면 안 되나? 사랑의 속성을 모르나? 이즈음에서 미국의 저명한 여성학자 바바라 G. 워커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기존의 동화를 다시 쓴 동화 모음집 <페미니스트 동화 Feminist Fairy Tales>가 생각난다. 여기엔 '백설 공주 Snow White'를  다시 쓴 '스노우 나이트 Snow Night'도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흑설 공주>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녀는 기존 동화에서 여성은 한결같이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표현되어 왔다고 주장하며, 남자에게 기대지 않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개척하는 백설공주를 보여준다. 이렇게 올바르게(?) 다시 쓰는(rewriting) 동화는 얼핏 아주 멋진 뒤집기처럼 보인다. 충분히 일리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스노우 나이트'에서는 공주와 왕비의 기본적 갈등구조를 없애고 계모가 공주를 돕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부정적인 여성상을 깨고 착하고 긍정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데 집착한 나머지, 이야기의 필수 조건인 갈등 구조와 드라마틱한 요소가 빠지고, 상투적이고 뻔한 모럴리즘만 남았다는 것이다. 문학에 대한 무지함이 스토리의 무미건조함과 문학적 가치의 상실로 결과된 것이다.


여성의 존재를 사랑에 목매는 존재로 보는 질 낮은 드라마, 남성에게 이기적인 만족감을 주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좋다. 우리가 그동안 익숙해있던 가치체계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고 다르게 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소망들과 꿈같은 해피 엔딩에 대한 판타지를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충족시킨다는 측면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무엇을 잃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간은 늘 '올바름' 속에서만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여성주의는 사물과 현상을 보는 많은 잣대 중 하나의 잣대이며, 모든 것에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를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드라마가 갖춘 장점들에 대해 세밀하게 알아본 후에 비판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한 끼의 밥상이 우리 앞에 놓이기 위해서는 식재료의 생산에서 유통, 요리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있다. 그런데 철딱서니없는 가장이나 아이들은 반찬 투정을 한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겉만 보고, 대충 눈팅하고...자신의 좁은 소견이 유일한 '올바름'인 듯 투정이나 하지 말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사물의 일부분이다. "니들이 드라마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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