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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28. 2019

로즈 베르탱, 오트쿠튀르의 원조

ㅡ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코디네이터

■다음 글은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의 로즈 베르탱 서술 부분 중 일부입니다.

ㅡ 열일곱 번째 이야기 ㅡ



가난한 시골 소녀, 세계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되다 


어느 날 한 가난한 시골 소녀가 우연히 마을의 점쟁이를 만난다. 그녀의 손금을 본 점쟁이에게서 미래에 궁정에서 일하게 되며 큰돈을 벌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예언을 듣고, 희망에 부푼 그녀는 곧장 파리로 상경한다. 그녀의 이름은 로즈 베르탱 Rose Bertin 1747-1813, 이 초라한 소녀는 후에 프랑스 왕비의 옷을 만드는 이 나라 제일의  드레스 메이커이자 사실상 세계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다.



로즈 베르탱


오늘날 파리는 패션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위상에 맞게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역시 프랑스 출신의 로즈 베르탱이다. 그녀는 샤넬, 디올, 지방시, 고티에 등 유명한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들의 선발주자이자 오트쿠튀르 Haute couture의 창시자이다.


베르탱은 1770년대, 16세에 파리로 상경해 귀부인들을 고객으로 하는 마드모아젤 파젤르 Mademoiselle Pagelle 모자상점 견습생으로 일하게 되는데, 그녀는 여기서 디자인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르트르 공작부인, 콩트 왕자비, 랑발 왕자비 등 당대의 영향력 있는 귀부인들의 옷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파리에는 상류층의 귀부인들의 옷과 모자를 만드는 이러한 패션 상점들이 있었다.


베르탱은 사르트르 공작부인의 후원으로 생 오노레 Saint-Honoré 거리에 고품격 옷가게인 ‘르 그랑 모골 Le Grand Mogol’이란 상점을 차리는데, 오늘날의 명품 브랜드 샵과 같은 것이다. 그녀의 상점은 귀부인들의 입소문을 통해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알려진다. 베르탱이 만든 드레스는 단박에 왕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그녀를 궁정에 불러 새 드레스를 맞췄고, 머리 스타일에 대해서도 자문을 구했다. 당시 세련된 패션문화를 가진 프랑스 궁정 사교계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촌스러운 패션 감각으로 귀족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었는데, 베르탱의 조언에 따라 옷을 만들어 입은 후부터는 일약 베르사유 궁의 패션니스타로 등극한다.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궁정 패션의 시초인 마담 퐁파두르 Madame Pompadure에 이어, 이제 베르사유 궁정 사교계의 2세대 패션 리더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탱의 드레스를 통해 오스트리아 여인이 아닌 세련된 프랑스 여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한편, 베르탱은 왕비의 패션을 따라 하고 싶어 안달 난 궁정의 귀부인들에게 드레스 디자인들을 슬그머니 흘렸고, 많은 여성들이 그녀의 패션을 모방했다. 그리고 베르탱은 자기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보는 것을 싫어해서 끝없이 자기만의 독특한 옷들을 주문했던 왕비의 욕망 때문에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베르탱이 만든 드레스들>


마담 르 브룅, <장미를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83, 캔버스에 유채, 린다 & 스튜어트 레스닉 컬렉션


베르탱이 디자인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도 회복

금속실, 스팽글, 유리 돌로 사치스럽게 장식되었고 속에는 슈미즈, 페티코트, 코르셋, 파니에 등을 입어 부풀려지고 무거워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춤을 추기에 힘든 무도회 예복이었다. 그러나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며, 환상적이고 화려한 모습을 뽐냈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크 드레스


베르탱이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재현작품)


왕정과 함께 몰락하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왕비는 감옥에 갇히고, 베르탱도 사치를 조장해 적폐를 만든 부패자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런던으로 망명했다. 혁명은 점점 더 폭력적 성향을 띠었고, 많은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직업을 잃고 외국으로 도망갔다. 귀족 고객들을 위해 일했던 이들은 조국에 남는다면 처형될 것이 뻔해 프랑스를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베르탱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궁정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 원조로 인해 재정 파탄에 이르렀고, 생산 감소로 식품 가격은 폭등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 경제적 난관에 처해 있었다. 가난에 지친 대중의 눈에, 베르탱은 국민을 먹여 살리는 대신 방종과 사치로 부패한 왕실의 배후에서 이득을 얻는 부도덕한 여자였다. 귀족들도 일찍이 그녀를 벼락 출세한 건방진 여자로 싫어했고, 공화파 역시 그녀를 귀족과 다를 것이 없는 청산 대상이며 썩어빠진 사치품의 제조자라고 비난했다. 이렇듯 베르탱은 혁명파, 왕당파 양쪽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처지였다. 반혁명분자들을 대상으로 대량학살을 한 1792년 ‘9월 대학살’ 이후, 그녀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마침내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착한다.  

    

베르탱은 망명지 런던에서도 외국인과 프랑스 망명자들을 대상으로 패션사업을 계속하며 국제적인 디자이너로서 성공한다. 베르사유 궁정에서의 명성은 브뤼셀, 베니스, 비엔나, 런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세계 각지에 알려졌고, 여러 나라의 고객들을 갖게 된다. 그리고 베르탱의 우아하고 독창적 작품은 프랑스를 패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그녀가 최고의 전성기에 있을 때 그녀의 날개를 꺾었다. 목숨을 잃을 위험이 사라져 파리에 돌아온 후에는 패션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으며, 재정적으로도 결코 옛날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그녀의 많은 귀족 고객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지불되지 않은 청구서만 수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화려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는 삽화에서 보듯 머리칼을 짧게 깎이고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촌부 같은 초라한 옷차림새였다. 그 호사스럽고 세련된 드레스를 입던 시절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혁명 분자들은 그녀를 죽일 명분을 얻기 위해 7세의 어린 아들 루이 샤를 Louis Charles을 꼬드기고 협박해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증언을 하게 했고,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치욕스러운 죽음과 함께 그 모든 화려했던 것들도 스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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