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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27. 2019

메리 카삿

ㅡ 인상파 화풍으로 그려낸 ‘가족의 시’

■다음 글은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의 일부내용입니다.

열다섯 이야기 



메리 카삿, 인상파 화풍으로 그려낸 ‘가족의 시’

<인상주의 여성 화가 두 번째 이야기>



현대 사회, 그 낯선 타인의 시선


카삿, <특별관람석에서>, 1878, 캔버스에 유채, 81.28 x 66.04 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19세기의 파리는 현대 도시로서의 풍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시 계획으로 대로가 만들어지고 대로를 따라 백화점과 고급 상품점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번화한 거리에서는 과시하듯 멋진 옷을 입은 패션 아이콘들이 걸어 다녔으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들의 차림새를 구경하고 누가 더 세련되었는지 비교했다. 한편, 현대적인 신흥도시 파리의 중심지였던 화려한 건축물 오페라 하우스에도 성장한 멋쟁이들이 모여들었다. 드가와 카삿 등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오페라 하우스를 종종 그렸다. 동료 남성 화가들처럼 현대 파리의 바, 카페, 댄스홀 등 활기찬 야외 공간에 접근할 수 없었던 카삿에게도 오페라 하우스는 갈 수 있었던 공공장소였다.  

금박 장식과 그림들, 모자이크, 멋진 계단과 발코니들을 갖춘 호화로운 오페라 하우스에는 무대뿐 아니라 공연 전후와 중간 휴식 시간 동안 관객들이 서로 스치는 사교 공간들이 많았고, 이 장소들에서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고 가는 다른 이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에는 한껏 차려입은 파리지앵들로 넘쳐났고, 그들은  서로를 보고  비교하고 최신 유행스타일을 경쟁했다.


'가족의 시' ㅡ 행복한 어머니와 아이     


1886년경부터는 인상주의에서 멀어져,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시키기 시작한다. 1890년대에, 메리 카삿은 가장 활동적이고 창의적이었다. 1874년 시작하여 1886년 8회까지 계속된 인상파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인상파 모임이 해체된 후, 그녀는 더 이상 전위미술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며 후기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등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녀는 이제 어떤 특정한 미술 운동과도 연관되지 않은 채 다양한 테크닉을 실험했다. 그러나 여전히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연락을 취했으며, 1917년 드가가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


마침내 1888년에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어머니와 아이의 주제가 등장한다. 이 시기의 카삿은 주로 아이를 씻기거나 젖을 먹이는 모습, 아이를 돌보는 모습 등 여성의 사적인 영역을 묘사했다. 오랫동안 그녀와 예술적 공감대를 나누며 교유했던 드가는 카페, 극장, 경마장 등 공공장소의 생활을 그린 것과 비교하면, 19세기 후반의 여성과 남성의 공간이 그림에 있어서도 이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메리 카삿은 스스로는 독신이었지만, 일생 동안 모성애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을 소재로 했다. 사실, 그녀의 명성은 인상주의 작품들보다 이러한 어머니와 어린이 소재의 그림들로부터 얻어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진 <아이의 목욕,>에서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씻기는 어머니의 부드럽고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아이의 피부, 스트라이프 무늬의 드레스, 대야, 바닥, 벽 등이 매우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듯, 그녀는 여성의 일상생활, 특히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 있는 장면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녀 작품의 거의 1/3은 이 주제이다. 가정의 친밀한 관계, 풍부한 감정을 표현해, 한 비평가는 그녀의 작품들을 ‘가족의 시’라고 일컬었다. 카삿은 어머니 역할의 중요성과 의미를 부각하려 하여 여성들을 격려한 점도 있으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자 한 여성들에게는 반감을 샀고 페미니스트들한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카삿, <모성>, 1890, 파스텔, 개인 소장
카삿, <아이의 목욕>, 1893, 캔버스에 유채, 100.3 x 66 cm, Art Institute of Chicago, 시카고



에필로그


메리 카삿과 베르트 모리조는 당시 여성들이 처했던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가정생활을 주요한 소재로 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페미니즘과 신여성의 개념을 자각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새로운 삶의 자세를 추구했던 여성들이었다.


비록 카삿은 작품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림 속의 여성들은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존재로서 품위 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들은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그린 종교화의 구도를 연상하게 하는데, 이것은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일을 성스럽고 고귀한 일로 생각하여 연관시키려고 한 것은 아닐까. 르네상스의 자애로운 마돈나의 모습과 그녀의 그림 속의 어머니의 다른 점이라면,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적이고 정직한 일상의 어머니라는 점일 것이다.


한편 드가와의 관계에 있어, 그녀가 여러 가지로 드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여성 예술가가 제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던 당시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봐야 한다. 또한, 카삿이 드가의 일방적인 예술적 수혜자라기보다는 평생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누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동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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