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고 여성에게 현모양처의 미덕을 강요했던 19세기 프랑스에, 남자 같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거친 작업복을 입고 파리의 도살장과 가축 시장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매우 독특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자 보뇌르, 동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그녀는 공개적인 레즈비언이었고, 페미니스트였으며, 여성과 동물을 사랑했다.
로자 보뇌르, 여성과 동물을 사랑한 화가
로자 보뇌르
로자 보뇌르 Rosa Bonheur 1822-1899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동물화가이다. 당대 여성 화가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인기와 명성을 누렸고 엄청난 부도 거머쥐었다. 19세기 중반기는 그림이 일상생활을 충실히 묘사해야 한다는 사실주의가 대세였고, 급속하게 도시화, 산업화되어가는 유럽 사회에서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그린 그림이 호소력을 얻었으므로, 로자 보뇌르와 같은 예술가들이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에콜 보자르를 중심으로 한 아카데믹한 미술, 즉 종교화와 역사화는 1830년대 이후 쇠퇴하고,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회화가 미술사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화가의 딸이었다. 아버지 오스카-레이드 보뇌르는 풍경화가이자 초상화가로서, 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했으며, 형제자매들도 모두 화가와 조각가로 활동했다. 찰스 다윈의 외사촌인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그의 에세이 『유전적 천재 Hereditary Genius』에서 보뇌르 가족을 천재성 유전의 예로 들 정도로,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듯하다. 그중에서도 로자 보뇌르는 단연 뛰어났다.
그녀는 동성애자로서 여성과 동물을 사랑하였고, 남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여성의 권리와 주체적 삶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여성들이 관습에 따른 것이 아닌 위대하고 멋진 작업들로 자신들의 권리를 확실하게 하라. "고 주장하며, 여성운동에도 참여한 19세기의 열정적인 페미니스트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동물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그녀가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자, 그녀의 어머니는 알파벳과 동물들의 이름을 연관시켜 그리게 하는 방식으로 글을 가르쳤다. 이런 식으로 글자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11살 때 세상을 떠나자, 보뇌르는 학교생활에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난폭하고 다루기 힘든 아이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여러 번 퇴학을 당하자,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화가로 훈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물을 자신의 스튜디오에 데려와 그녀가 동물 그리기에 대한 흥미를 느끼도록 했다. 로자 보뇌르의 동물들에 대한 사랑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정상적인 학교 생활과 교우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그녀에게 동물들은 정서적 안정과 치료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녀는 집에서 기르는 토끼, 새, 양들 속에서 살았고, 파리 근교 목초지의 말, 양, 소, 염소, 토끼 등의 가축, 그리고 블로뉴 숲의 동물들을 항상 가까이에서 보며 관찰할 수 있었다. 야외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동물들을 그리며 보냈고, 동물들을 사랑해 그들이 죽는 것을 볼 때는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남자 같이 머리를 자르고 남자 같이 옷을 입고
주변의 소녀들은 소년같이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한 그녀를 전혀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연모하기조차 했다. 이렇듯 평상시 남장을 했던 그녀가 어느 날 집안에서 여성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웃 사람이 여장 남자로 오해하고 신고해,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차림새는 도살장과 말 시장, 동물 해부학실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려야 했던 화가에게는 실용적이고 편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보뇌르는 작업실보다는 야외에서 더 많이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19세기 중반에 유행한 멋진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바지를 입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생각해 보라.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야외로, 도살장으로, 가축 시장으로 돌아다니며 작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사람들의 조롱과 험담을 들었지만, 평생 남자 농부들이 입는 셔츠와 바지를 입었고 부츠를 신었다. 또한 공개적으로 담배를 피우고 사냥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남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수컷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그리는 황소들뿐이다."라고 말하는 등 남자 옷을 입고 다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여성의 복장이 끊임없이 나를 성가시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경찰 당국에 남자 옷을 입을 권한을 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입는 옷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작업복이다. 멍청이들의 비판은 결코 나를 흔들리게 한 적이 없다.” 이렇듯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자 옷을 입고 살았다. 심지어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공장소에서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아내는데, 당시에는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금지되었고, 만약 입고 싶다면 당국의 허락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야외 데생 외에, 보뇌르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니콜라스 푸생, 루벤스 등과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실력을 연마했다. 또한, 동물의 뼈와 근육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제리코 Gericault가 그랬듯이 파리의 도살장을 찾아다니며 사온 고기를 해부했고, 매주 가축 시장 혹은 말 시장을 찾아가 말들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동물에 관한 삽화가 그려진 책들을 읽고 공부하거나 숲과 숯 굽는 사람들, 나무꾼, 사냥꾼의 오두막에 오래 머물며 스케치를 했다. 스케치를 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에서 고립된 채 개구리 다리, 검은 빵과 우유만 먹으며 6주간이나 산 적도 있다. 한편, 수의 학교에서 동물을 해부하며 동물 해부학 및 골학을 공부한 덕분에,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숙련된 솜씨로 말, 소, 염소, 양 등을 그려낼 수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숙련된 화가가 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입학이 허가되어 여성들도 미술학교 École des Beaux-Art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해부학을 배울 수 있는 누드 수업에서는 제외되었고, 결과적으로 회화의 꽃인 역사화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여성 화가들은 어쩔 수 없이 역사화 이외의 장르로 돌아서야만 했다. 메리 카셋은 어머니와 아이들을 그렸고, 세실리아 보는 초상화, 베르트 모리소는 현대의 중상류층 가정의 삶을 그렸으며, 로자 보뇌르는 동물화가로 활약했다. 사후 그녀의 명성은 다른 유명한 여성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급격히 떨어졌으나, 20세기의 대부분의 동물화가들은 로자 보뇌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물에 빠지다
RB, <니베르네의 경작>, 1849, 캔버스에 유채, 1.34 x 2.60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니베르네의 경작>은 보뇌르의 첫 번째 성공작으로,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첫 전시회 이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그녀는 1848년 들라크루아, 코로, 앵그르가 심사위원인 한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았고, 곧 프랑스 정부로부터 농경을 주제로 한 작품을 의뢰받아 니베르네 지역의 풍경과 소를 그리게 된 것이다. 세잔이 “소름 끼치도록 실물과 똑같다.”고 말했던 이 작품으로 보뇌르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이 그림에서 19세기 농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유명한 프랑스 소인 샤롤레로 유명한 니베르네 지방의 수소들이 6마리씩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햇볕이 쨍쨍한 가을날에 수소들이 밭을 갈고 있는데, 잘 갈아진 흙이 비옥해 보이고 뒤의 풍경은 햇빛 속에서 평화롭다. 농부들은 동물들 뒤에 거의 가려진 채 그 존재감이 미약하다.
사실주의 양식으로 프랑스 농촌 생활과 동물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미국 미술사가인 앨버트 보임은 이 그림이 농촌 생활의 찬가로서, 산업혁명 이후 도시가 발달하면서 복잡하고 분주해진 생활에서 벗어난 전통적인 생활 방식에 대한 경의와 동경을 표현한다고 비평한다. 밀레 Millet, 쿠르베 Courbet의 사실주의 전통을 잇는 그림이지만, 전형적인 프랑스 농촌의 풍경을 좀 더 낭만적, 감상적 시각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소의 근육 묘사와 미묘한 색상의 변화는 감상의 즐거움을 준다. 농부와 수소의 노동은 도시 관람자들에게는 힘들다기보다 한가롭고 평온한 이미지로만 보인다.
로자 보뇌르, <말 시장>, 1852-55, 캔버스에 유채, 2.44 x 5.06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말 시장>은 <니베르네의 경작>과 함께 보뇌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파리 길거리의 말을 파는 장면을 묘사한 거대한 규모의 그림으로, 그녀에게 국제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이다. <니베르네의 경작>으로 얻은 명성은 이제 이 작품으로 국제적인 찬사로 확장되며, 보뇌르는 이후 영국 빅토리아 여왕, 프랑스의 외제니 황후 등 많은 유명인사 추종자들을 갖게 된다. 이 작품은 미국의 대부호 코넬리우스 밴더빌트가 엄청난 가격으로 구입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작품을 소장한 메트로폴리탄 웹사이트는 “작가는 조지 스텁스, 테오도르 제리코, 외젠 들라크루아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녀 자신은 <말 시장>을 그녀의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라고 언급했다.”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녀의 그림은 몸부림치는 근육의 말들을 묘사한 그리스 신전 프리즈의 부조를 연상시키며, 거대한 크기 속에서 풍부한 색상과 고전 조각의 역동적인 구성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동물들이 거의 살아있는 듯 움직임과 생기로 가득 차 있다.
공개적인 레즈비언, 그리고 페미니스트
로자 보뇌르는 여성 예술가 또는 레즈비언들에게 하나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 선구적인 여성이지만, 미술사의 많은 재능 있고 주목할 만한 여성 화기들과 마찬가지로 미술사에서는 잊힌 화가이다. 더구나 19세기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에 의해 명성을 잃었고, 그녀의 인기도 사후 급격히 떨어졌다. 그녀의 감상적인 작품들은 현대 모더니즘 미술가들에게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