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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26. 2019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

ㅡ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애 초상화가

■다음 글은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에서 빠짐.대신 파올라 모더존 베커, 수잔 발라동,한나 회흐, 안나 마리아 가스웨이트가 첨가됨.

열두 번째 이야기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한 화가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그리고 이 비운의 왕비를 그린 화가는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 Élisabeth Vigée-Le Brun 1755-1842이다. 그녀는 살벌한 궁정 암투 속에서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장 아끼는 초상화가이자 친구였다.


마담 르 브룅, <장미를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83, 캔버스에 유채, 린다 & 스튜어트 레스닉 콜렉션


마담 르 브룅은 여자가 자신들보다 더 명성을 얻고 더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에 심기가 불편한 남자 화가들의 질투를 샀다. 당시 미술계에서 여성이 성공한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고, 그들은 마담 르 브룅의 출세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동료 화가들과 비평가들은 마담 르 브룅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고 누군가가 대신그려준다는 근거 없는 비방을 했다. 혹은, 그녀를 연모하는 화가 메나조 M. Ménageot가 그림의 마무리를 돕는다는 악의에 찬 루머를 퍼트리기도 했다. 또한, 그녀가 미모를 이용해 여러 고객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악의적인 가십을 퍼트리거나,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동성애 관계를 의심하기도 했다. 남자들은 전문적인 미술 작업에서 여성이 그녀와 같은 성취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루머는 사실이 아니었고, 마담 르 브룅 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시대인 라이벌로서 프랑스 아카데미에 같이 입성했던 라비유-귀야르Labiller-Guiardeh 역시 겪어야 했던 성차별적 시련일 뿐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왕과 왕비가 체포되자, 마담 르 브렁은 딸과 함께 이탈리아로 도주해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이며 왕정주의자였던 그녀 때문에 남편도 투옥되었고, 남편은 이혼 소송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로 사태는 급박했다. 마담 르 브룅 자신은 신분을 숨기고 변장까지 하며 십수 년간 타국을 떠돌았다. 그러나 전화위복이었는지 이탈리아로의 망명은 전통적으로 미술가의 필수 코스였던 이탈리아 미술 수학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그녀의 작품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독일 등지로 다니며 작업실을 열고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 작업을 계속했는데, 그녀의 사업은 여전히 번성했다. 유럽 전역의 영향력 있는 왕족과 귀족 등 최상류층과 교우했고 그들의 초상화 주문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은 그녀를 위기에 빠트렸지만, 18세기 유럽에서 프랑스 문화는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이미 명성이 높았던 마담 르 브룅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왕족과 귀족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1802년 타국에서 12년을 보낸 후 가족들의 구명 활동으로 반혁명분자의 명단에서 이름이 빠진 마담 르 브렁은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나폴레옹과 조세핀 왕비의 점심 식사에 초대될 정도로 다시 명성을 누리면서 86세까지 장수했다.  


현대의 관람자에게는 마담 르 브룅의 초상화들이 전통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많은 초상화에서 발견되는 약간 벌린 입으로 표현되는 미소, 생기와 에너지는 당시로서는 일종의 파격이었다. 또한, 마담 르 브룅은 의뢰인들을 그녀가 고안해낸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녀의 작업실에 몰려든 의뢰인들은 이 예술가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낸 자신들의 활기차고 매혹적인 모습에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 전문가들조차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에 페미니즘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다시 역사의 장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마담 르 브룅은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잊히고 폄하된 여성 미술가였을 뿐 아니라, 여성 화가들을 새롭게 발굴하려고 노력했던 20세기에 와서조차 공격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의 페미니스트 철학 저서인 <제2의 성 Le Deuxième Sexe>은 마담 르 브룅의 작품들이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부응했다고 비판했다. 보부아르는 모성애를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노예 근성의 형태로 보았고, 딸을 꼭 껴안은 채 행복한 표정을 짓는 마담 르 브룅에게 역겨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담 르 브룅은 그녀 자기 자신에 집중하여 성찰하는 대신, 모성애 같은 것으로 진정한 자아를 소멸시켜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마담 르 브룅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한 것일까? 마담 르 브룅은 조국과 남편을 떠난 12년간의 타국 생활에서,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문, 혹은 불가능했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모성애를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현대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으로 18세기 여성의 삶을 비판할 수 있을까? 시대에 따라 다른 각각의 가치관에 상관없이, 마담 르 브룅은 당대의 여성이 처한 상황에서 자기 나름의 치열하고 주체적인 삶과 예술혼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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