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거나 친절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박애주의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내가 '사람 싫어'를 외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의 주변인도 '네가?'를 연신 외치며, 아닐 거라며 일시적일 거라곤 한다. 하지만 내 내면에서의 변화로 스스로 혼란스럽기엔 충분했고, 그것이 뒤엉켜 이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조차 힘든 나날들이다.
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고는 '다 좋아' 혹은 '난 괜찮아'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사랑받기 위함이었을까, 무엇이 필요하고 부족했던 것일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자부했는데 그 조차 나를 '착함'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는 더 높은 벽을 세우게 했다. 착한 아이, 혹은 착한 인간상에 나를 끼워 맞추고는 그렇지 못한 언행을 할 때마다 점점 강하게 채찍질을 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래서는 안 되었다고.
소시오패스 사수에게 존중과 헌신을 다하던 어느 날, 한 가지 의구심이 나를 톡 건드렸다. '혹시 나 이용당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녀는 내게 가벼운 칭찬과 인정을 주었다. 아주 다루기 쉬웠겠지. 그저 말, 한 두 마디의 말이면 나는 감동하는 사람이었기에. 내가 늘 타인에게 바라던 그 달콤한 말, 그렇기에 뿌리듯 하고 다니던 말이라서 이상함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나처럼 남들에게 애정이 많은 사람이겠거니, 그런 표정으로 마음에 없는 말을 할 거라곤 짐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늘 배려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야근을 하던 날 내가 가방을 챙기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탁, 불을 꺼버리고는 '먼저 나가있을게요~' 외친다거나, 바쁘게 점심식사를 하면서 회의를 하는 시간에는 뒷정리라는 것을 또 아는지 모르는지. 모를 거라고 믿고 싶었던 나는, 그녀에게 아주 열심히 내가 한 일을 갖다 바치듯 정리해서 보고했다. 아주 친절한 결과물이어서 10분 만에 이해하고는 자신이 한 것처럼 대표에게 보고했을 거다. 그래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조차도 눈치채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맞다, 나는 친절했다. 그게 전부다.
착한 게 아니라 친절한 거야.
엄한 곳에다가 화를 내버렸다. 내가 어떤 불만을 속에 품은지도 모른 채 엄마에게 언성을 높여 자신 있게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착한 딸'을 주입한 엄마가 원망스러웠던 걸까, 밖에서는 한없이 상냥하면서 집에선 반항을 해대던 나에게 어리석다며 혼났던 기억 때문인지도. 아니. 아직까지도 착한 막내딸만 바라보고, 까칠해진 요즘의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금의 엄마가 괜스레 내 가슴을 무겁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착함과 친절함은 다시 봐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단어만 바꿨을 뿐 오래도록 내게 베인 습관을 바꾼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다들 본인이 '듣고 싶은 말'을 내게 하는 걸로 들렸다. 그렇다면 그들의 마음을 얻는 법은 쉬웠다. 기억했다가 다른 언어로 치환한 다음 그 말을 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도 따스하고 다정한 그리고 상대가 바라던 답은 없을 것이라며. 그래도 이따금씩 나만 이런 말을 해준다 싶을 땐, 그가 원하는 어떠한 말도 알면서 해주지 않았다. 침묵하면 되는 일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자비롭고 싶지 않더라.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유난히도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봤던 내가 그런 극단적으로 변화한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니 삶 자체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가까운 사람부터 나를 제외한 모두를 남으로 규정한 뒤에 관계에 대한 유용성을 모두 '이용가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그러자 너무 울렁거려 구역질이 났다. 심지어는 엄마랑 단 둘이 있는 시간에도 난 헛구역질을 해대며 혹은 참아가며 대화를 해야만 했다. 이 진절머리 나는 세상에 순수한 사랑이라는 게 가당키나 할지 감히 이런 생각을 해댔던 것 같다.
그 덕에 깊게 불행했고, 시니컬함을 얻었다. 하지만 사랑과 감수성이 없던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 달달함을 다시 찾아 헤매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모두를 의심하고 사는 것보다는, 믿고 사는 세상이 되려 맘이 편하다는 걸 알아버렸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는데, 나만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남들은 아무 상관 안 하는데 혼자 믿었다, 배신했다, 믿어보기로 한 시간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것은 마치 나 스스로 구덩이를 팠다가 넣었다가 혼자 열심히 빠져나와 헐떡이는 형상이었다.
원래의 내 모습으로 사는 게 이렇게나 힘든 것이었다니. 이런 경험을 하기 전의 내가 참 속 편하고 부럽다 싶을 정도다. 인류애 가득히 성장할 수 있던 유년시절에 감사해야 할지, 지금껏 큰 상처 없이 지나온 운 좋은 세월들에 감사해야 할지. 그 와중에 20대 초부터 겪은 유난했던 상처 몇 가지가 스쳐 지나가는 걸 보니, 아예 운이 좋았다고는 결론 지을 수 없겠다. 외적 갈등을 외면하기 위해 속앓이를 치열하게 해왔을지도 모르는 내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와의 대화에서 결론은 더는 '피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러곤 누군가에게 차갑게 대하는 모습에 작별을 고하지는 않았다. 불쑥 찾아와 제 얘기만 꺼내놓는 대상을 쏘듯이 쳐다보고는 그렇지만 상대의 남은 하루를 생각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것, 모두 다 내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나조차 이렇게도 모순적인데 하물며 세상은 얼마나 더 모순이 가득한지 인정이 되는 지점이었다. 차차 그것도 받아들여 나가야겠다 다짐한다. 이 글에서도 능동과 수동이 공존하는 얼마나! 역동적인 순간들인가!
이 모순 가득한 지나온 것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하고 싶다. 퇴사를 결심한 즈음에 열정을 다한 일을 놓지 않고 싶은 마음의 반대에는 그저 모든 걸 놓고 싶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지만 반면 위로와 감명을 주는 것조차 사람이라는 사실에 피어오르던 '모순'을 이해하기 어려하던 시기에 읽던 책이 있었다. 「모순 - 양귀자」에서 아래 문구를 꺼내어 본다.
모든 되풀이되는 일에는 내성이 생기는 법이었다. 나와 진모는, 모욕감을 느낀 어머니조차도 아버지 없는 생활에 하등의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차라리 더욱 씩씩하고 점차 이모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중략) 아마도 아버지는 슬픈 일몰에조차 꿈쩍하지 않을 내성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 95p
내성이라는 게 생기는 시기가 왔나 보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뎌지면서, 내가 겪는 새로운 겸연쩍은 순간들에는 늘 새로운 것인 양 무겁게 대하겠지. 그래도 남의 아픔에 대해 나의 더한 무언가를 얘기하며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없길 바란다.
내가 애정을 갖는 사람들이 이제 나에게 힘듦을 토로한다면, 해줄 수 있는 말은 '나 여기에 있어' 정도만 남아있다. 말이 아니라 동적인 온기로 혹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정적인 온기로 그들을 안아주고 싶다.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온기가 나까지도 자연스레 감싸줄 것이라 믿고 다짐한다. 이만큼이나 말을 써 내려갔지만, 그러한 사유로 이만 말을 줄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