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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15. 2021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22. 살



 해안의 구릉을 벗어날 동안 그녀는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죄의식은 숨기면 숨길수록 커진다. 나는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꺼내 흘려보내야 한다. 그 과정을 공유하는 것 자체로 우리 사이에 작은 이야기 하나가 추가되는 것뿐이다.

 “밤도 어둡고,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잘못하면 넘어질까 봐 잠시 잡아드렸어요.”

 나는 괜히 지나간 일을 꺼냈다. 여전히 그녀의 소매를 쥐고 있었기에 서로가 인지하는 그 행동의 은밀함 외에도 산뜻한 배려를 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들릴지 안 들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각자의 마음으로 숨은 떨림을 느끼는 시간은 이미 충분히 주어졌기에 남은 과제는 빈 감각을 내 이야기로 채우는 것이었다.

 “섬이 참 좋네요. 저는 오 년 전 이곳에 혼자 왔어요. 그때도 이렇게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린 기억이 나요. 지금은 도로가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엉망이었거든요.”

 “운전을 잘하시나 봐요.”

 “운전을 안 하세요?”

 “네.”

 그녀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 두 달도 계속 여기서만 지냈어요. 가까운 가게만 조금씩 돌아다니고 가끔 마트에 가고요.”

 그녀는 제주도의 다른 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그녀의 생활 패턴을 그려보았다.

 “쇠소깍이라고 가보셨어요? 저는 그곳이 제일 좋았거든요.”

 “아니요, 안 가봤어요. 거기는 어땠어요?”

 튀어나오는 대로 말하다 보니 가보지도 않은 곳을 말해버렸다. 오 년 전에 어떻게든 갔어야 했는데. 나는 그곳을 상상해서 설명해보기로 했다.

 “이 섬에 돌이 많잖아요. 그곳의 바위들도 엄청 크고 각이 져 있어요. 우리가 보통 계곡에서 보는 그런 둥그스름한 돌이 아닌 거예요.”

 “아.”

 “그곳에 가면 나룻배를 탈 수 있거든요. 강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코스인데 양 끝으로는 바위와 그 위에 자란 나무들이 푸르게 우거지고 아래로 가면 바다로 향하는 길목에 선착장이 있어요. 먼바다로 나가는 그 강의 끝에서 나룻배 코스를 마치는 거예요.”

 “괜찮네요. 저도 여기서 그런 걸 해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벌써 오 년 전 일이라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혹시나 해서 붙인 마지막 말이 변명처럼 느껴졌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설명한 것과 다르다면 오 년 동안 바뀐 게 아니겠는가. 그녀는 자기가 보지 못한 어떤 강의 모습을 그려보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소매 끝에서 조금 더 손목 쪽으로 손을 옮겨 잡으며 암석 지대를 벗어났다.

 통나무 계단을 올라오는 그녀의 뒤로 우리가 서 있던 바다가 보였다. 여전히 달빛에 물든 바다. 저곳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금 막 배를 타고 이 섬에 상륙한 사람처럼 내 마음의 감정과 머릿속 생각들은 모두 새로워져 있었다. 이 계단을 내려가기 전과 내려온 뒤의 나는 달랐다. 이 계단을 올라오기 전과 올라온 뒤의 나도 달랐다. 그런 생각에 빠진 순간 그녀가 살며시 손목을 뺐고 그만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고마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차 타고 가실래요?”

 “차요?”

 무슨 일이 일어나야 그녀는 나와 자기 자신을 우리라고 부르게 될까.

 “저는 차를 가지고 왔거든요. 걸어서 오신 거죠.”

 “네.”

 그녀는 고민하는 듯했다. 우리가 현무암의 구릉에서 만난 건 우연이었다. 그곳에서 발이 미끌린 그녀가 내게 안긴 것도 우연이었다. 많이 양보해주면 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이곳까지 올라온 것도 우연으로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내 차에 올라타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선택의 영역이었다. 나는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 앞까지만 태워 주시면 돼요.”

 그녀가 천천히 조수석으로 걸어왔다.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가 잠긴 문을 열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마자 금방 차 안은 더워졌다. 차 안을 가득 메운 우리의 열기 때문에 에어컨을 끝까지 돌려 바람을 세게 틀어야 했다.

 “오랜만에 타보네요.”

 “운전을 안 하셔서 그렇구나.”

 “그것도 있고, 보통 운전석에 앉지 옆자리에 앉을 일은 없잖아요.”

 “남편분이랑 있을 때는 자주 탔겠어요.”

 굳이 남편 이야기를 꺼릴 필요는 없었다. 그를 입에 올리는 게 지금의 관계를 편안하게 해주는 데는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이야기도 점점 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바빠서.”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고 나도 그 이야기를 길게 이끌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호텔 너머의 양옥 주택 하나를 가리켰다.

 “저 집 앞에 내려주시면 돼요.”

 “어떻게 빌린 거예요?”

 “아는 분이 제주도에 산 집인데 지금은 해외에 계셔서 안 쓴다고 하더라고요. 돈도 별로 안 드리고 사람 사는 집처럼 관리나 해달래서 그러고 있어요.”

 “맞아요. 집도 사람이 없으면 그대로 표가 나더라고요.”

 “그렇죠. 주방도 그렇고 거실도 그렇고. 마당을 관리하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그녀의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그녀가 마당을 가꾸기 위해 해야만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걱정하고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걱정하는 그녀의 하소연을 들으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을 게 아니에요. 한번은 배수로를 제때에 정리하지 않았더니 빗물이 빠지지 않고 마당에 고이는 거예요. 세상에나.”

 “그동안 일은 하지 않고 뭐한 거예요.”

 “아니, 저는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데 여기 비 오는 양이 장난이 아니어서.”

 그녀는 오랜만에 말동무를 찾은 듯 즐거워 보였다. 이곳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제주도에 친한 분 없으세요?”

 “없어요. 그나마 이 집 빌려준 분이 가까운 사이였고 제가 있는 걸 아는 친구 하나가 오기로 했고요.”

 “그분은 언제 온대요?”

 “주말 껴서 온다고 했으니 토요일일 거예요.”

 오늘이 수요일이니 그녀의 친구가 오기까지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 얼마나 진전시킬 수 있을까.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는 교차로에서 신호등에 걸린 틈을 이용해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엿보았다. 옆으로 길게 그어진 눈매와 그 끝으로 보이는 주름이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그녀의 코는 적당한 크기로 오똑하게 솟아 있었고 수술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로 도톰하게 뻗은 인중과 윗입술. 그녀의 입술은 그곳의 살처럼 붉었다.

 “신호 왔어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내가 교차로를 지나 차를 세웠다. 멈추고 난 뒤에도 그녀는 바로 내리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틈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내가 리드하는 게 좋을지 그녀에게 맡기는 게 좋을지 고민되었다.

 내가 만든 상황 속에서 그녀는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리드해야 할 여자가 아닐까.

 “시간 괜찮으면 제가 말한 쇠소깍에 같이 가볼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겉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꺼내는 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요, 저는 멀미가 심해서. 오리배도 못 타요.”

 아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구체적인 제안의 거절인지 전반적인 사람을 향한 거절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에서 다른 제안을 덧붙이는 건 조금 어수룩해 보이지 않을까.

 다행히 그녀가 자기 역할을 해주었다.

 “아니면 내일 저녁에 다시 오세요. 아니, 오늘 저녁이구나. 제가 잘 아는 꼬막 요릿집이 있어요. 오늘 제가 있었던 자리가 달 보기에는 가장 좋은 자리인데 거기도 나름 괜찮아요. 창가에 앉으면 바다 위로 뜬 달이 바로 보이거든요.”

 “좋아하는 곳이 있나 봐요.”

 단번에 좋다고 말하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가다 보니 사장님이 전화만 하면 창가 자리를 비워주더라고요. 고맙게도요.”

 “좋은 분이시네요.”

 일부러 조금 더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번호를 알려주면 제가 연락할게요.”

 그녀에게 휴대폰을 내밀자 그녀가 그걸 받아 자기의 번호를 눌렀다.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저는 김윤진이라고 해요.”

 “아직 이름도 말을 안 했구나.”

 그녀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곧은 턱선과 목덜미, 그 곁으로 머릿결에 잠긴 어깨와 우물처럼 깊은 쇄골, 숨은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의 살결까지 한꺼번에 내 눈으로 들어와 애써 시선을 피해야 했다.

 “저는 임수경이라고 해요.”

 나는 그녀의 이름을 바로 외웠다.

 “내일 오후에 연락할게요. 아니, 오늘 오후죠?”

 “오전에 재미있게 노시고 오후에 연락 주세요.”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동안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세 달 동안 남편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면 앞으로 더 보지 않아도 괜찮은 게 아닐까.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더 자세히 듣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몸을 만지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힘이 들어간 바지가 불편했다. 그녀의 곁에 누워 그녀의 몸을 하나하나 알아내고 싶었다. 이미 불은 당겨졌고 내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일인지 그녀도 이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지 분명히 확인하고 싶었다.

 호텔로 돌아가며 나는 노래를 듣지 않았다. 달빛에 비친 암석, 그 위에 앉은 그녀의 동그란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작은 코, 쫑긋한 귀. 그녀는 나보다 연상이 분명했다. 그녀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나이를 묻지 말아야 한다.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것보다는 훨씬 어릴 줄 알았어요.’

 대충 말린 앞머리,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까만 머리칼, 헐렁한 흰 티셔츠. 그녀는 속옷을 입었을까. 내 기억 속 모든 것들이 나를 흥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발목, 분홍빛 복숭아뼈. 발을 핥으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발등에 올올이 일어난 푸른 혈관까지. 내가 본 그녀의 몸 하나하나가 머릿속으로 낱낱이 정리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순서를 맞춰가며 내 머릿속에서 한 여자의 모습으로 떠올랐다.

 엉덩이, 그리 붙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드러난 엉덩이와 허리 사이의 곡선. 그녀의 바지는 지퍼가 아니라 단추였다. 움푹 파인 쇄골. 나는 그녀의 어깨에 혀를 대는 상상을 했다. 그것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한 여자의 떨림을 그렸다. 이미 그녀를 가진 것처럼 흥분되기 시작했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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