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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17. 2021

바깥의 풍경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23. 바깥의 풍경



 술이라도 진탕 마신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어젯밤 그녀와 나눈 대화가 보였다. 별것도 아닌 내용이었지만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득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있는 여자를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가면 갈수록 부장이 한 말이 맞는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것이 없었다. 멍청이 중의 멍청이였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녀는 왜 그곳에 나와 있었을까. 생각보다 먼 길이었다. 차로 수백 미터를 조금 더 가야 하는 거리. 그만한 길을 그런 신발을 신고 나와 암석 위를 걸었을 그녀를 생각하니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내 손을 잡지 않고는 혼자 발도 가누기 어려운 험한 암석 지대였다.

 그녀는 정말 달만 보러 나갔던 걸까.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계속 달만 보다가 집으로 돌아갔을까.

 차라리 철없이 어린 여자애나 꼬드길 걸 그랬다. 괜히 이러다 문제만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편이 알아차린다거나 소송이 들어온다거나. 나는 침대에 누워 불길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행복한 미래도 상상해보았다.

 우리의 관계가 길게 이어진다 한들 어디까지나 갈 수 있을까. 내가 그녀를 이혼시키고 같이 산다?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고작해야 자기소개서나 보내는 형편에 그럴 여력이 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이 섬에서 만난 사람은 이 섬에서 만난 인연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 이상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녀도 그 이상을 바라지는 못하리라. 설령 더한 것을 기대한다 해도 그걸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섬에서는 그 어떤 약속도 하루 이상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여기에 이르자 마음은 편안해졌다.

 하루만 약속한 것이다. 오늘 만나서 내일을 약속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는 그녀에게 일주일을 정해 내려왔다고 했고 그녀도 한 달을 지내려다 세 달을 넘겼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하는 오늘이나 내일은 원래 서로에게 없는 날이었다. 각자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이곳에서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해 제주도에 머무는 기간을 늘리고 있고 나는 없는 형편을 쥐어짜 겨우 이곳에 왔으니 무언가 서로에게 보완이 되는 듯도 하다. 엉뚱한 생각인가.

 이런저런 설명과 변명을 읊어보았지만 딱 떨어지는 답안은 나오지 않았다. 한번 자고 말 사이일 수도 있고 일방만 원하는 관계로 끝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내게는 대안이 없기에 오늘 그녀와의 약속에 관하여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당연히 만나는 것이다. 가서 생각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가서 알아보자. 정말 아무런 계획도 없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자 한산한 수영장의 풍경이 펼쳐졌다. 풀장 옆에 누운 한 남자가 갑자기 걷힌 커튼에 놀라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자연스러운 척 애를 쓰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 광경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이 기묘한 호텔에 적응하기로 마음먹고 방을 나섰다.

 이미 빈 객실 정리를 마친 듯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복도를 따라 일 층 객실을 지나쳤다. 세워진 디귿의 왼쪽 모서리 끝에 닿자 오른쪽으로 긴 복도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수영장을 바라보는 창문들과 그 창문 앞마다 일인용 의자와 탁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기묘한 취향이었다. 둘도 아니고 하나씩이라니. 내 생각처럼 변태가 맞는 걸까. 기묘한 관음증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복도에 난 첫 번째 창 앞에 섰다. 풀장에 나온 아이들과 반대편 끝에 누운 부부 한 쌍의 한가로운 모습이 보였다. 별 느낌 없는 풍경에 의자를 빼고 그곳에 앉아 보았다. 그러자 비로소 이 호텔을 설계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창문은 온전히 타인의 시각에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림처럼, 그때의 그 전복 요릿집에서 두 사람이 찍은 투명한 창틀에 갇힌 풍경처럼. 바로 나가면 내가 그 아래 설 수 있을 듯한 하늘과 풍덩 빠질 수 있는 수영장이 그 의자에 앉으면 온전히 세상 밖의 것이자 타인의 즐거움처럼 보였다.

 그 순간 이 호텔의 주인이 우울증 환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뚜렷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문제를 읽자마자 답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우울증 환자의 시선이 어떠한지를 객실에 묵는 고객들에게 암시하기 위해 이런 복도를 만든 게 아닐까. 이런 넓은 공간을 고작해야 복도와 창문 몇 개, 일인용 의자와 탁자들로 채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겨우 사람 얼굴 하나가 들어갈 만한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너무나 남의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닌 아이들, 내 것이 아닌 아내와 남편, 내 것이 아닌 즐거움과 쾌활함, 저 평화로움, 햇살과 나무 아래의 그늘까지도. 모두 누군가의 것이었고 그 어디에도 내 지분은 없었다. 나는 조금 우울해진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편 객실까지 가보려 했지만 그럴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 방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풀장으로 가는 입구가 왼편으로 나타났지만 그곳으로 눈을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 호텔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데스크로 가 따져 묻고 싶었다. 물론 그건 내 상식에 비추어도 도무지 예의가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저런 창을 만들고 의자를 가져다 두어 객실의 손님들로 하여금 실수로라도 앉게 만든 그의 행동에서도 예의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말씀하시죠.”

 데스크의 직원이 싹싹하게 대답했다. 어제 나를 응대한 직원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답해주기를 바라며 질문을 꺼냈다.

 “이 호텔은 개인 소유인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자초지종을 설명해봐야 나만 바보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저기 복도 끝에 가니 꽤 넓은 공간이 있던데, 창문 몇 개랑 일인용 의자, 테이블뿐이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저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고객분들도 계시지요.”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도 조금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저 자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나는 직원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더는 해줄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저렇게 지어졌다는 말이죠?”

 “네. 저희 호텔의 자랑거리이기도 합니다.”

 아마 저 멘트는 윗사람이 가르쳐주어 외운 것이리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마자 아까 본 그 남자가 의자에 누운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번만큼은 나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는 간신히 풀장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해두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나는 커튼을 쳤다. 이제 서로가 편안할 것이었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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