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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22. 2021

사랑이라는 것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25. 사랑이라는 것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창문과 앞 유리와 나를 차례로 살피던 그녀는 멀리 나타난 주차장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내가 모르는 불안이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아직 오전이었지만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이곳이 인기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밝은 척 나를 돌아보았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낯선 장소에 낯선 사람과 함께 있음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연약한 존재였다. 직장도 잘 다니던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쥐었다.

 “같이 걸어도 되죠?”

 잡은 손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그녀가 내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었다. 입장료는 오 년 전보다 조금 올라 있었다. 영이 있던 자리에 네모나게 잘라 붙인 숫자 오가 보였다. 수십 걸음을 걸어가 고작 그 광경을 보고 나오는데 한 사람당 이천오백 원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와 약속한 나들이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게 선팅이 된 유리창 아래로 신용카드를 돌려주는 손이 나타났다. 카드를 받아 그녀와 함께 폭포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곳은 그날의 풍경 그대로였다.

 “그늘이 많구나.”

 “나무가 있네요.”

 “그늘 쪽으로 걷자.”

 그녀가 나를 그늘 아래로 이끌었다. 자그마한 나뭇잎마저 자기만의 작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새삼 놀라며 그녀와 함께 나무 아래를 걸었다. 어느새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우거진 가지와 잎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릴 때 같아.”

 “어릴 적에 이런 기억이 있었어요?”

 “그늘 아래 선 게 내 어린 시절 같아.”

 나도 고개를 들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줄기에서 뻗은 가지와 빼곡히 들어선 이파리들. 두터운 그늘 속 떨어지는 잎사귀와 지나간 한 줄기 바람마저 그저 시원할 뿐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나는 내가 젊은 줄 몰랐어. 이 잎들이 나를 가려주는 줄 몰랐어.”

 다시 나를 보는 선글라스 속 그녀의 눈은 조금은 슬퍼 보였다.

 “우거진 나뭇가지와 잎이 모두 내 젊음 같아. 이십 대일 때는 저것들이 나를 지켜주는 줄 몰랐어. 그래서 그렇게 바보처럼 보낼 수 있었던 거야.”

 이곳은 그녀의 공간이었다. 우리 곁을 지나는 연인과 가족들의 모습이 마치 소리가 꺼진 영상 속 인물들처럼 생기를 잃었다. 대신 내 손을 잡고서 가지를 바라보는 그녀만이 오로지 이곳에 남은 유일한 사람처럼 나로 하여금 목소리를 듣고 온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싶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 올 따뜻함이었다. 잡은 손끝에 닿은 온기가 아니라 양팔과 가슴, 배와 다리로 느껴지는 한 사람의 체온이었다. 그녀를 품어줄 이가 필요했다. 사랑도 욕망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필요가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하지만 내게는 용기가 없었다. 그녀를 안음으로써 감당해야 할 다음 과제들을 겪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온전한 보살핌이었다. 이 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자 이 섬에 특별한 목적을 품고 온 사람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내일을 약속할 수 없었다. 그녀와 잔다면 오늘이 끝이리라. 내일 잘 수 있다면 내일이 끝일 것이다. 그녀를 보듬는 일은 달랐다. 나는 그녀를 책임질 수 없었다.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점수를 따지는 못했지만 잃은 것도 아니었다.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무작정 들이댈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온전한 인격체로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대신 적당한 사이로 하룻밤을 보낼 확률을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을 그녀 혼자 보내도록 남겨두는 건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아니었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실제로도 나는 그녀가 겪을 감정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러니 나는 정말 모른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따뜻한 안김. 그것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하리라. 그러니 나는 모르는 척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윽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놀랐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에요.”

 “너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이번에는 그녀가 앞장서 걸었다. 미안한 마음에 앞선 그녀의 뒷모습만 보던 나는 그녀가 잡아끈 손에 이끌려 폭포로 향했다. 그곳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폭포가 있었다. 오늘의 햇살은 그날과 달랐지만 폭포만큼은 예전과 같았다. 우리를 어딘가로 밀어내줄 폭포가 그곳에 있었다. 다시 서로를 부르는 어지러운 목소리와 커다란 카메라를 든 아저씨들 사이로 그녀가 애써 자리를 만들며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더 가까이 듣기 위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안에서 더 크게 들릴 그 소리를 정확히 기억하기 위해 그녀가 나를 데리고 한 걸음씩 폭포로 다가섰다. 만약 물속에 들어갈 수만 있었더라면 우리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그늘 밑 서로가 품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고백하고 마치 계곡물에 빠진 아이들처럼 물장구를 치며 무거운 마음을 홀가분하게 흩어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우린 정말 사랑이라는 걸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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