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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24. 2021

어깨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26. 어깨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외출이었지만 이미 그녀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안다는 듯 그녀는 잠을 덜 자서 그렇다며 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게 사과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변명은 자연스러웠다. 자기의 힘없음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늘 내가 힘든 이유가 앞이나 옆에 앉은 당신 때문이 아님을 반드시 알려 줘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주로 밤에만 나오다 보니 낮에는 항상 커튼을 치고 살아. 오늘처럼 이렇게 환한 낮에 돌아다니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그래서 그런지 계속 피곤하고 졸리네. 네가 불편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누나가 피곤한 건 내가 감당할 부분이지 누나가 미안할 일은 아니에요. 아마 누나를 아는 사람이 낮에 함께 다닌다면 피곤한 모습도 견딜 준비가 된 거겠죠?”

 그녀는 지친 가운데서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별말 없이 그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현무암의 암석 지대가 멀리 섬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볼 동안 나는 잠시 그녀를 훔쳐본 것 외에는 어디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아무것도 쥐지 않은 그녀의 빈손을 힐끗거렸다. 왼 허벅지 위에 올려져 가만히 펼친 손바닥. 그 손의 살집은 구름처럼 부드러웠고 마디는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내 얼굴을 쓰다듬을 때 저 부드러운 살결로 내 볼을 만지리라. 나를 끌어안을 때 깍지 낀 손가락 사이의 마디가 사슬처럼 단단히 내 몸을 결박하리라.

 그녀의 손가락 끝을 핥고 싶었다. 혀를 넓게 펼쳐 손끝의 지문을 감추고 손톱과 살갗 사이의 얇은 틈을 돌아 위아래로 오므린 입술 사이로 그녀의 약지를 끌어당기고 싶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페달을 밟았다. 우리를 밀어내는 힘이 자꾸만 우리의 몸을 뒤로 밀착시켰다. 어느새 암석 지대는 풍경에서 사라진 뒤였다. 다시 교차로에 멈추었다가 그녀의 집으로 차를 돌렸다. 아까보다는 힘이 난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낮에 움직여야 해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게 더 나을 거예요.”

 “나도 알지. 그런데 밤이 되면 자꾸 생각이 돌고 눈이 크게 떠져서 잠이 오질 않아.”

 그녀의 시선이 닿은 마루의 유리창에는 긴 커튼이 쳐져 있었다. 한낮에도 커튼을 치고 사는 모습을 보니 낮에는 자고 밤에만 돌아다닌다던 그녀의 이야기가 비로소 마음에 와닿았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걱정되었지만 그런 생각은 말라며 그녀가 나를 안심시켰다.

 “안 씻고 안 움직여도 먹는 건 잘 챙겨 먹어. 걱정하지 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머뭇거리는 그녀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다. 할 말이 있나 싶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뭐 할 거니?”

 “다락이 예쁜 카페가 있대서 가보려고요. 저는 야행성이 아니라 지금 돌아다녀야 해요.”

 “미안해, 너무 화내지 마.”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는 얼마간 내가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보다 성숙한 여자였다. 내가 아직 격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녀는 자기 곁에 선 사람이 그런 상태라는 걸 쉽게 알아챘다.

 “미안해요. 누나한테 불만이 있는 건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나 때문일지도 몰라. 그래서 친구들도 조금씩 나랑 연락하기를 꺼렸거든. 느껴져, 말은 하지 않지만 느낄 수 있어. 신기하지? 가끔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알아차리기도 해. 이 친구가 이 글을 읽자마자 이렇게 생각하겠구나, 바로는 안 보겠구나.”

 “너무 내다보지 말아요.”

 “내다보는 게 아니야. 그냥 알아차리는 거지. 알게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냐. 심지어 대부분 안 좋은 감정이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잘 모른다? 나쁜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어. 좋은 일을 이야기할 때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안 보여. 그런데 나쁜 이야기를 할 때면 어떻게 느끼는지 다 보여. 다 읽을 수 있어.”

 나까지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 감정은 정말 그녀에게서 옮아온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줄 수는 없었다. 계속 기다렸지만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시간을 끌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올래? 집으로 바로 오면 돼. 내가 저녁을 해줄게. 밖에서 사 먹으면 괜히 비싸기만 하고 양도 부실하거든. 여기는 뭐만 하면 다 오만 원 십만 원이야.”

 “좋죠. 오면서 연락할게요.”

 “가는 카페는 어디 있니? 여기는 새로운 카페들이 많이 생기고 또 닫는 것 같더라. 사는 사람들이 자주 가는 카페는 별로 없고 대부분 서울이나 육지에서 오는 사람들 기호에 맞춰 만든 인테리어 위주의 카페들이야. 일이 년 지나면 바로 싹 뜯어고쳐야 하나 봐. 취향도 금방 바뀌고 사람들이 식상해한다나.”

 “그런 얘기는 어디에서 들어요?”

 “얘는. 나도 최소한의 이야기는 듣고 살지. 하다못해 어제 먹은 그 가게에 가도 혼자 있으면 가끔 사장님이 말을 걸러 온다고. 그럼 이런 이야기나 주워듣는 거야. 그 가게는 오래된 곳이어서 유행을 타거나 하지 않거든. 다른 가게들이 생기고 없어지는 데는 별 감흥이 없으신가 봐.”

 “좋네요. 이따 오면서 연락할게요.”

 “먹고 싶은 건 있니? 내가 요리를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혼자서 몇 달을 지내다 보니 무엇이든 적당히는 할 수 있지. 아마 난 들어가자마자 바로 잠들 거야. 오후 내내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자고 일어나면 보통 마트부터 가. 가서 그날 먹을 음식을 정하지. 호박이 맛있어 보이면 호박으로 시작하고 가지가 좋아 보이면 가지로 시도하는 거야. 식단만 고민해도 하루가 금방 지나간단다.”

 “괜찮네요. 이따 같이 생각해볼까요.”

 “그것도 좋지. 근데 가는 카페는 어떤 곳이야? 여기 카페들도 찾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이 모두 다르더라고. 어느 곳은 어른들이 많이 가시고 어느 곳은 인테리어가 예쁘장하고 집기나 그릇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여자애들이 자주 가고 또 어느 곳은 커플 위주로만 손님이 가득 차기도 하고.”

 “그냥 경치가 좋은 카페 하나를 찾았어요. 어차피 남자고 혼자 가는데 고독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풍경 하나만 건지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벨트도 풀지 않은 채 그녀가 신난다는 듯이 웃었다. 마치 내가 아니라 그녀가 가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동네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면서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아는 사람처럼 그녀는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내 욕구를 자극했다.

 나는 그녀를 눕히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 씻는 그녀를 기다리고 싶었다.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가 멈추고 포근한 향기와 함께 수건으로 몸을 가릴 그녀의 어깨를 핥고 싶었다.

 “내가 너무 오래 이야기했지.”

 시선이 초점을 잃은 걸 알았는지 그녀가 살며시 벨트를 풀었다. 이제는 벨트를 푸는 몸짓마저 야하게 느껴졌다. 풀고 열고 일어서는 모든 동작이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들어갈게. 이따 연락해.”

 “푹 쉬어요.”

 걸어가는 그녀를 보기 위해 창문을 내렸다. 열쇠로 대문을 연 그녀가 아직 떠나지 않은 나를 알아보고는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문이 닫히고 마당을 걷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커튼을 걷거나 마루의 창문이 열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잠들리라.

 내가 그녀에게 얽매여 있다는 게 문득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득이 될 게 없는 관계였다. 얻을 것도 없고 길게 이어질 수도 없었다. 그녀도 한때 만난 괜찮은 어린애 정도로 나를 기억할 게 뻔했다.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을 만날 때는 나도 그 정도 생각이 전부였다. 진지한 관계를 갖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이들이었다. 그녀도 나를 그렇게만 바라보기에 이리도 편하게 대하는 것은 아닐까.

 그걸 이용해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이용해 관계를 진전시키고 우리 사이의 관계를 육체적인 데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그녀의 죄책감에 어린 내 후회 정도라면 관계를 가진 뒤에도 어렵지 않게 서로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섹스를 하고도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방금 커튼이 흔들린 듯했지만 착각일 것이다. 여전히 벽 너머로 설핏 보이는 거실의 창으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 창문을 올렸다. 사람들이 붐비기 전에 서둘러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일렬로 줄지어 가는 차들 사이로 끼어들 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방향지시등을 켰지만 단 한 대의 차도 나를 쉽게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머리부터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금세 경적이 울리며 차 하나가 급제동을 하며 멈춰 섰다.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차피 이곳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비상등도 켜지 않고서 그대로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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