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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26. 2021

해바라기 밭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27. 해바라기 밭



 나는 왜 그곳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천천히 달리는 내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이 빠르게 시선을 벗어났다. 그 카페에서의 추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서혜, 우리가 알아본 찻잔, 온실을 엮은 담쟁이넝쿨, 성현이와 내가 찾아낸 능소화, 이 층의 작은 정원까지도.

 추억을 되새기려 온 여행은 아니었다. 혼자 그곳에서 두 사람을 떠올리며 덧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 풍경은 지금 떠올려도 아름다웠다. 얼마 되지 않는 기억들 가운데서도 다시는 가지 못할 장소가 생겨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쩌면 또 운명 같은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곳에 가면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우연 말이다. 나는 그녀라 생각하면서도 두 사람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방금 떠올린 그녀라는 단어가 둘 중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내 마음도 혼란스러운 듯했다. 이따금 그 둘은 한 여자처럼 떠올랐다. 내 기억은 두 사람과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카페로 가는 도로에서 나는 해바라기 밭을 보았다. 돌멩이로 쌓아 올린 울타리 한쪽을 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해바라기 밭은 빽빽하게 자란 밀밭처럼 풍성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늦으면 자리를 잡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 그 밭을 지나쳐 버렸다. 이삼 분 남짓 달렸을까. 문득 서혜가 떠올랐다. 현무암 지대를 발견하고서 차를 세워달라던 그녀의 요구를 나는 깔끔하게 거절하고 밥을 먹었다. 결국 우리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번 지나치면 끝이었다. 다음이란 것은 없었다. 보고 싶은 풍경과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 순간만 지나 보내면 잊혔다. 그리고 어느 날 그곳에 가지 못했다는, 그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내 마음을 괴롭힌다. 카페를 들렀다 나오는 길에 아까의 그 해바라기 밭에서 잠시 머무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곳은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다.

 바로 차를 돌렸다. 한 번에 돌지 못해 여러 번 후진과 전진을 반복한 다음에야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행히 해바라기 밭은 그대로였다. 일 분 일 초만 늦어도 그 밭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차에서 내려 꽃들 사이를 걷자 바다에서 불어온 소금기 어린 바람이 나와 그들을 한 데 몰아 흔든다.

 이렇게 바람을 맞고 서 있으면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정말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 한때 머무를 뿐인 사람과 영원한 것 사이를 이어주는 무언가가 정말 있을까. 바람이 불어오는 데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던 옛사람들이야말로 진실에 가 닿았던 것이 아닐까. 그들에 비하면 낮이나 밤에 부는 바람의 차이를 규명하려 애쓰는 우리의 일은 너무나 외로운 것이었다.

 나는 육지와 바다를 잇는 바람 가운데서 나와 오 년 전 그들 사이를 잇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건 순전히 한 사람만의 기억이라 치부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짚어내지 못한 무언가가 아직 이 섬에 남아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우정도 아니었다.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으니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었다. 한순간의 떨림? 그런 걸로는 부족했다. 오랜 시간을 넘어 나와 그들 사이를 이은 무언가를 나는 아직 분명히 밝혀내지 못했다. 추억, 아니었다. 그리움, 맞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공허. 그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빽빽한 줄만 알았던 해바라기 밭은 의외로 듬성듬성했다. 해바라기들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띄워 자랐고 그들의 커다란 얼굴과 긴 줄기가 마치 수확기의 밀밭처럼 넓은 대지를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뿐이었다. 한 송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해바라기들, 적어도 한 그루라고는 불러야 할 듯한 해바라기들. 그들 하나하나에는 밭이라 뭉뚱그려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단 하나도 같은 키가 없었고 꽃잎에 접힌 주름의 모양도 달랐다. 기어 다니는 벌들은 어느 꽃은 지나쳤고 어느 꽃에는 한참을 머물렀다. 줄기의 양옆으로 벌어진 잎은 더러는 벌레가 먹었고 더러는 티 없이 깨끗했다. 그들은 서로 달랐지만 하나의 무리처럼 지내고 있었다. 나도 이곳에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한 뼘의 해바라기 밭으로만 알고 잊었으리라. 이윽고 불어온 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 가운데 선 내 양팔을 들추고 사라진다.

 두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마치 하나의 낙인처럼 내 삶에 남아 있었다. 허무라고 부르기에는 어떤 힘마저 불러오는 이 감정은 분노나 공허에 가까웠다. 간절히 쫓아간 끝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챈 낙담보다 무언가를 얻었지만 얻은 줄도 모르고 지나쳐 버린 사람이 그제야 느껴야 하는 필연적인 허탈과 분노. 나는 그들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 그때는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두 사람을 모두 놓친 것 같았다. 주소록에 남은 전화번호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때를 놓친 사람의 지나온 넋두리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으리라.

 차에 올라타 오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눕고 싶었다. 내가 그리 어리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불을 덮고 누운 그녀의 머리칼과 부드러운 목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그녀와는 자고 싶었다. 그녀와 한 침대에 눕기 위해 무언가가 필요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든 우리는 하나로 뒤엉키게 될 것이다. 그녀는 나를 거절할 수 없고 거절해서도 안 된다. 차가운 핸들을 쥔 내 손은 이미 그녀의 몸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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