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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Nov 19. 2021

파리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24. 파리



 “그러니까, 호텔의 구조가 마음에 안 든다 이거지?”

 “꼭 그렇다기보단 그렇게 만든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거죠.”

 그녀는 나를 귀엽게 보는 듯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보니 일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누구든 붙잡아 호텔 건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안과 밖에서 서로를 향한 시선이 단절되어 있으니 창밖에 선 사람과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거예요. 차마 손을 흔들 용기가 나지 않는 거죠. 여긴 내 세상 거긴 네 세상, 나는 놀러 왔지만 네게 거긴 사생활, 그러므로 우린 남남 서로 방해하지 않기.”

 “일리 있네. 주택에 있어서 그런가 도통 그럴 일이 없다 보니.”

 그녀가 서비스로 나온 육전을 젓가락으로 찢기 시작했다.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나뉜 육전을 유심히 살피던 내가 재빨리 젓가락을 들어 그녀가 집으려던 육전 조각을 낚아챘다.

 “제가 봐 둔 거였어요.”

 그녀가 할 말을 잃고 웃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장에 찍은 육전 조각을 우물거리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어이가 없네.”

 소감을 밝히는 그녀를 못 본 척하며 꼬막무침을 집어 앞접시에 덜었다. 두껍고 빳빳한 김 한 장을 들고 꼬막무침과 부추, 마늘 한쪽을 차례로 올렸다. 먹음직스럽게 쌓아 올린 쌈을 그녀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눈치가 보여서 괜히 말을 꺼냈다.

 “제 기호에 맞춘 거라 드릴 수가 없네요.”

 “어차피 줄 생각도 아니었잖아.”

 자극을 받은 듯 그녀도 무던히 쌈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채 썬 고추와 쌈장, 꼬막 몇 점과 따뜻하게 데친 깻잎 반 조각. 김 한 장에 말아 올린 그것을 그대로 입안에 넣으려다가 무심코 옆에 앉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더러 보라는 듯 한입에 삼켜버렸다.

 “올 때마다 매번 이렇게 드시는 건 아니죠.”

 “당연하지.”

 우물거리는 입을 한 손으로 가리며 그녀가 간신히 대답했다.

 “혼자 올 때는 보통 비빔밥 한 그릇만 먹고 가는데.”

 “그걸로 배가 차나요.”

 “여기서 지내다 보니 먹는 양이 줄었어. 별로 차리지도 않고 간단하게 반찬이랑 국 끓이는 정도?”

 그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내가 잔을 들 때마다 맞장구를 치듯 함께 잔을 들어 간신히 입술 끝만 적시는 수준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투명의 술잔 너머로 젖은 그녀의 입술을 훔쳐보았다. 잔가에 남은 붉은 입술 자국은 어제 본 그녀의 어깨와 가슴 언저리의 살갗처럼 내 눈을 어지럽혔다.

 “이야기해봐. 어디서 잘지도 모르는 상태로 급하게 이 섬에 내려온 이유가 뭔지.”

 그러자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내야 했다. 그녀에게 좋게 보일까. 어디서 끊어야 하고 어떤 모습으로 시작해야 가장 보기에 좋을까. 제삼자가 듣기에 가장 아름다울 장면은 어디였을까. 목장에서 내가 부린 호승심? 노루를 박은 뒤 내가 보인 수습력? 차라리 침착함이라 하는 게 어울리겠다. 개구리, 노루의 눈동자, 귀를 먹먹하게 만들던 개구리들의 울음소리.

 그녀는 젓가락을 놓고서 뒤이어 나올 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옆으로 창밖을 향해 트인 넓은 바다의 전경이 보였다.

 “여기가 왜 좋다고 했는지 알겠어요.”

 가게의 밖은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까지 가려면 돌로 쌓은 야트막한 울타리와 이차선으로 만들어진 해안도로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고 도롯가에 선 가로수들도 서로 거리를 띄워 듬성듬성 심겨 있기에 우리의 시선과 달 사이에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짙어진 구름이 잠시 달 앞을 지날 때마다 달빛은 사그라지다 바다 위로 펼쳐지기를 반복했다. 그 순간 나는 아무런 고민이나 걱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 시절이 그리웠나 봐요. 그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잠시 친구랑 술을 마시다 가끔 꺼내는 안줏거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나 봐요.”

 그녀에게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도 덜어내지 않고 해주었다. 튀어나온 광대와 턱을 향한 갈망을 이야기할 때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밤중에 튀어나온 노루와 부딪쳤을 때 그녀는 그날의 나처럼 놀랐다. 쉬었다 가라는 서혜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는 좋은 사람처럼 보았고, 휴대폰을 돌려주려고 지나온 길을 돌아갈 때는 다소 의아해하는 듯했다.

 “일부러 그 차에 놔둔 게 아닐까?”

 “성현이가요?”

 “걔가 내리기 전에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며. 여자 성격에 안 찾아봤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떠밀리듯 내린 것도 아니고.”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그들의 펜션에 콘돔을 사 들고 간 일화를 꺼냈다. 그녀는 성현이에게 들킬 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보다 더 조마조마하고 즐거워했다. 이 층에서 뛰어내려 서귀포로 도망칠 생각을 했다고 할 때는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끝내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날 내가 밟은 개구리, 타이어에 짓눌려 몸 곳곳이 터져버린 개구리들의 붉은 자국.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내 잘못인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왠지 두 사람이랑 관계가 더 진전되었을 것 같은데.”

 “저랑 깊어진 사람이 누구일 것 같아요?”

 “여자의 감으로 보면 지금까지는 옆에 앉은 분인 것 같은데. 네가 더 좋아했을 사람은 뒤에 앉은 분인 것 같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때 저는 성현이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더 놀라운데? 옆에 앉은 분 이름이 성현이랬지.”

 “뒤에 앉은 친구가 서혜고요.”

 “서혜.”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요. 저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그 친구랑 그렇게 될지 정말 몰랐어요. 남 일처럼 옆에서 들으면 바로 이해가 가나요?”

 “마음으로 좋아하거나 서로가 동시에 좋아한다 해도 잘 안 될 수 있거든. 엮이는 건 몸이지 마음이 아니니까. 마음은 겉으로 내보이지 않으면 계속 그 안에 숨어 있는 거야.”

 나보다 나이 든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려다 간신히 참았다. 말해주거든 놀라는 척하자. 말해주거든 그때 놀라는 척하자.

 “같이 놀았던 다음날 그 친구가 저한테 먼저 전화를 걸었어요. 자기는 몸이 안 좋다며 펜션에 남았고 서혜 혼자 차를 몰고 북서쪽 해안도로랑 카페를 다녀오겠다며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둘러 데리러 갔죠. 이런 걸 놓치면 남자가 아니지.”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내 몸짓을 보며 그녀가 웃었다. 나는 술을 한잔 더 마셨고 그녀도 조금씩만 입에 대던 술잔을 단번에 털어 넣었다.

 “아이고, 이렇게 마시면 안 되는데.”

 “조금만 드세요.”

 “잤을 때는 좋았어?”

 “잔 걸 어떻게 알아요.”

 “그러려고 간 거 아냐.”

 그녀가 다 안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손 위에 놓인 아이처럼 속이 다 들킨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할 건 다 했죠.”

 “좋았구나.”

 사실대로 말할지 거짓말을 할지가 고민되었다. 그녀에게 감출 필요는 없는데 왜 그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좋았죠.”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서 그녀는 누나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돌로 지은 울타리와 인적 없는 도로, 듬성듬성한 가로수와 푸른 바다, 구름진 하늘 속 노란 달이 있었다.

 그녀를 속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굳이 밝힐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부끄러운 마음을 잊고 싶어서 괜히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나는 왜 내려온 거예요?”

 어렵지 않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자기가 내려온 이유에 대해 혼자 오랫동안 생각해온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홀로 삼 개월 동안 이 섬에 머물며 저 망망대해와 달만 보고 지내왔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짚는 것 외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도 오 년, 십 년 전의 삶까지 돌이켜보며 수십 번 어제 일처럼 곱씹었을 것이다.

 “삶이 왜 이렇게 힘들까. 너처럼 어린애한테 한탄할 건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나름 의미가 있겠지?”

 그녀는 해답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우리는 그럴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내가 말과 행동을 조심할 동안 그녀는 다시 한 손으로 빈 술잔을 쥐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랬거든. 대학에 다닐 땐 아무런 문제 없이 지냈어. 오히려 재미있게 보냈지. 내가 외모가 되니 인기도 있었어. 방금 그 표정 장난친 거지? 그렇게 이해할게. 아무튼 운 좋게 지금 남편을 만나서 오래 연애도 하고 딱 서른 즈음에 결혼했지. 다 순조로웠어. 실수한 것도 없고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었어. 대학도 잘 나왔고 취업도 잘했고 결혼도 다들 잘했다고들 하니 그런 것 같고.”

 “직장이 있었네요.”

 “내가 백수인 줄 알았니. 지금은 나왔지. 여기 오며 퇴사했어. 어차피 남편이 잘 버니 나한테 부담이 크지 않았거든. 쉬고 싶다고 하니 선뜻 그러라 하더라고. 고마운 사람이지. 아니, 정말 고마운 사람일까? 차라리 밥벌이에 쫓겨 살았으면 이런 호사스러운 고민은 안 하지 않았을까 싶어.”

 조금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게는 그녀를 향한 욕구가 분명히 있었다. 그녀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그녀는 자기의 속내를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이야기는 우리 사이에서 다소 정직한 관계를 잇는 데나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다.

 잘 모르는 주제였기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그 정도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우리는 서로의 시선이 겹치지 않도록 다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빈 잔에 술을 붓더니 한입에 들이킨 그녀가 탁하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세상이 왜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말을 하고 나서야 내가 어린애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부끄러워져 무슨 말이라도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질문을 만들어냈다.

 “누나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부족한 거? 부족한 거야 많지.”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오르는 어떤 힘을 발견했다. 그건 오 년 전 카페에서 성현이와 이야기하며 본 눈이기도 했고 다음 날 숙소로 데려온 성현이가 서혜를 이야기하며 내보인 눈이기도 했다. 한때 그건 자신만만함이었고 다른 한때는 분노였다. 그러나 방금 내게 보인 그녀 눈 속의 무언가는 달랐다. 그건 자신만만함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건 한 사람의 욕심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얻고야 말겠다는 의지나 철저한 준비와는 거리가 먼 막연한 욕구였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도 거기에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나올 때도, 오 년 전 제주도로 홀연히 떠났을 때도, 목장 앞 주차장에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 때도, 오늘 새벽 그녀를 만날 걸 그리다 문득 잠들었을 때도 내 마음에 남은 건 지금 그녀의 눈에서 피어오른 것과 같은 막연한 욕구였다.

 “생각해봐,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학교 다닐 때 나보다 덜 예쁘고 성격이 안 좋은 애들조차 지금은 나보다 인기가 많아. 단지 결혼을 안 했다고, 인스타그램을 일찍 시작했다고, 별것도 아닌 케이블 방송이나 인터넷 영상에 우연히 얼굴 한번 비추었다고 말이야. 유튜브로 돈을 버는 친구들을 생각해보라고. 주변에 없니? 말도 안 되는 가십거리나 만들고 퍼진 헛소문만 끌어다 모아 영상 하나를 만들어 올리는데 월 몇 천씩 번다잖아. 내가 그런 애들보다 못할 게 뭐야. 외모가 못해, 몸이 별로야, 성격이 안 좋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녀의 이야기에 뭐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해? 나보다 못한 사람도 유명하게 살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인격을 가지고도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고 많은 인기를 끌며 연예인처럼 지내는데 걔들보다 더 열심히 살고 바르게 살아온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하게 살다 죽어야 해?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어. 너는 이런 상황이 이해가 가니?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어?”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나와 비슷한 인간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누구의 말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듣는 이만 필요한 사람처럼 그녀는 자기의 생각을 쉼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방금 그녀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몸도 가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그녀의 성격에서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조금은 침울하지만 성숙한 누나일 뿐이었다.

 그녀가 보는 세상을 나는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내 충동에 따라 살아왔을 뿐이다. 그녀가 말한 세상을 이해했기에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반드시 이해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도 아니었다. 살다 보면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고 운이 좋으면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가끔은 예측 가능한 삶이 내가 아는 인생의 전부였다. 그 이상의 바람이 없기에 그 이상의 불만도 없었다.

 “너무 많은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

 “아니. 그건 네가 어려서 그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내며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너는 아직 이십 대니까.”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너무 놀랐지?”

 갑자기 굳은 표정을 풀더니 그녀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급변한 태도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가끔 기분이 이래. 그러니 내가 아직 여기에 있는 거야. 나도 이상하다는 걸 알아. 그래서 돌아가지 못하겠어. 내가 멍청하고 못나 보여. 우리 집에 거울이 없어. 내가 오자마자 다 치워버렸어. 화장실에만 있지. 그것까지 떼어낼 순 없으니. 제주도에 와 가장 먼저 한 게 보이는 대로 거울을 끌어다 모아 창고에 숨기는 거였어.”

 “산책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밤에는 걷고 있지.”

 “낮에는요?”

 그녀가 주저하던 끝에 대답했다.

 “낮에는 잘 안 움직여. 밤에만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날 너를 만난 거지. 이상하게도 밤에는 힘이 솟더라. 그나저나 참 놀라운 인연이지 않니.”

 이런 식으로 그녀와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지만 아직 그녀가 내게 해가 될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자기 상태에 솔직한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낮에는 보통 어디에 가니.”

 문득 받아 든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다. 다시 생각나는 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바닷가나 드라이브 코스? 카페에도 가고요. 목장도 많잖아요. 오름 같은 데는 올라가 봤어요?”

 “땀 흘리는 건 싫어. 좀 더 평탄한 곳은 없니? 시원하고.”

 떠오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천지연 폭포 가봤어요? 거기가 평지에다 그늘이 많아서 좋죠. 심지어 폭포니까 시원한 기분도 들고요.”

 “누구랑 갔었는데?”

 “그때 걔들이랑.”

 “걔들이랑은 안 가본 데가 없구나.”

 하마터면 쇠소깍은 안 가봤다고 말할 뻔했다. 그녀가 에둘러 산책을 제안한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이상한 일에 휘말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에 취해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혼자 술을 따르며 그녀는 내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해진 대답을 해야 할지 이 상황을 이대로 어색하게 흘려보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런다고 해서 그녀와 잘 수 있을까. 이 정도 관계로도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더 나아간 관계는 무언가 다른 행동을 요구하고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나는 우리 관계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릴 능력은 있었지만 그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녀보다는 미성숙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던진 화살이 다트판 가운데 이십 점짜리에 떨어질지 삼 점짜리에 떨어질지는 처음 해보는 초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일 천지연 폭포에 가볼래요? 안 가봤다고 했잖아요”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이것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농담이 아니기도 했다.

 “당연하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도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이런 데 넘어가지 않아. 나이가 몇인데.”

 가게 안으로 날아든 파리를 쫓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린애가 데이트를 신청하면 받아주는 것도 누나의 책임이겠지? 뭘 하는 것도 아니고 산책만 다녀오는 건데 말이야.”

 그녀는 완전히 주도권을 쥔 상태였다. 이대로 관계를 진전시켰을 때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지만 분명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녀와 자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와는 다른 사이즈의 붙는 티셔츠 속으로 그녀의 검은 브래지어가 비쳤다. 오자마자 덥다며 카디건을 벗어던진 그녀의 어깨 아래로 가슴을 타이트하게 묶은 검은 끈이 보였다. 그 끈의 끝으로 손가락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한 조각 남은 육전을 삼켰다. 이빨 사이로 물큰한 육즙과 바삭한 튀김옷의 기름기가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무심코 그들을 씹다 묻은 마른 살점을 젖은 휴지로 닦아내야 했다. 앉은 자세가 불편해 계속해서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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