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 이러고 있는,
시집 맨 앞에 이런 시를 둘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만큼 시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을 겁니다. 보통 시는 이미 하고 있거나, 하지 않거나, 하고 싶은데 하지 않거나, 하기 싫은데 하고 있거나 뭐 그런 식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는 참 신기합니다. 아무것도 세워두지 않았습니다. 밀물처럼 들어오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김선우 시인 시 중에 '대천바다 물 밀리듯 큰물이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야'라는 시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게 제목입니다. 아무것도 세워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밀물처럼 들어오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저 시는 나중에 올려야겠네요.
김경미 시인이 아마 「고통을 달래는 순서」를 낼 때만 해도 직장을 잘 다니고 있었나 그랬습니다. 왜 이걸 기억하는진 모르겠는데, 그 다음 시집에선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전업 시인은 힘들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시를 보면 직장을 잘 다니고 있다고 한 건 취소해야겠습니다. 열이 나는 건 이미 싸우고 있는 겁니다. 두려움은 나아갈 길이 보일 때 생깁니다. 그리움은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고, 못질은 상처받을만큼 소중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며, 늘 이러고 있는 건 늘 꿈꾸던, 품고 살던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가 자운영 꽃을 알려주듯 글도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경미 시인의 시들은 다 이 시집에 있습니다. 절판되어서 구할 수가 없다고 하네요. 중고 거래창에도 안 나옵니다. 염소처럼 풀쩍 놀랐다는 표현이 재밌습니다. 흉내라도 내보고 싶네요. 커튼이라도 쳐야겠습니다.
이러고 있는,
비가 자운영 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고통을 달래는 순서」, 김경미 시인, 창비,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