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주 시인, 초식(草食)
충분히 무언가의 암시로 볼만한 표현들입니다. 살을 발라낸다. 무른 살이 갈라진다. 혀를 도려간다. 그에 비하면 식칼 끝이 얼굴을 더듬고, 뼈와 칼끝 사이로 초점을 맞추고, 턱뼈 아래로 불쑥 들어온 식칼의 서늘함은 그 무엇도 가리키지 않는 듯 합니다. 이렇게 분명히 구분지어 놓았으니 아래에서는 무언가 나오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내려가봐도 그 무언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꿈틀거리는 단어들이 보입니다. 멀리 던져진 염소 대가리. 몇 번이고 찾아가 뼛국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핥는 개. 깊은 곳까지 들어와 숨겨진 살을 바르는 바람. 뼛구멍을 씻겨준 빗물. 어쩌면 무언가의 단어일 것 같은데, 끝까지 그림자만 보여주고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를 찾아냅니다.
'갖게 된'입니다. 여기서 앞의 연들이 5연으로 오는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표현이 자기목적적임은 그것이 '하다', '이다'로 마무리지어졌기에 알 수 있었습니다. '하다'와 '이다'는 곁에 아무도 두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온전한 표현이며 때로는 오만하기까지 합니다. 살을 발라내고, 뼛국을 우리며, 개가 와서 핥고 남은 깊은 살마저 바람과 빗물이 훑어내리자, 비로소 염소 대가리는 둥글게 팬 눈구멍과 희고 단단한 이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갖게 된'은 앞의 4연을 그 수하에 둡니다. 이제 이 시는 시작합니다.
그런데, 남은 게 한 줄입니다. 풀밭을 기다린다. 어라. 이제 막 시가 시작됐는데 바로 끝났습니다. 그럼 제목으로 돌아갑니다. 초식. 그럼 여기서 초식은 풀을 먹는게 아니구나. 풀이 그 풀이 아니구나. 이 시는 순환이나 회귀, 다시금 본성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앞의 표현들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습니다. 아니 염소는 이제야 비로소 저 거대한 눈구멍과 단단한 이빨을 가지게 되었는데, 흡사 이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초식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 자연으로부터 깊은 곳까지 치유를 받는, 혹은 그것조차도 잔인하게 여기는 시인의 마음을 따라 끝나다니. 난 더 자극적인 걸 원합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을 때 제목을 '육식(肉食)'으로 바꾸어 읽어봅니다. 그리고, 제목을 바꾸는 외에 아무것도 손대지 않습니다.
가벼웠던 시가 무거워집니다. 은은하던 시가 과해집니다. 모호하던 시가 단순해집니다. 잔인, 비참, 경멸, 자연조차 그러하다는 사실이 주는 섬짓함, 그 끝에 가축과 초식동물의 꺼풀을 벗은 그가 마치 보복의 연쇄처럼 노리는 풀밭은 더이상 자연스레 돌아오거나 희구할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그곳은 희생자를 올릴 제단이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게 될 장소입니다. 제가 염소 대가리라면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저 희고 단단한 이빨로 말입니다.
초식(草食)
식칼 끝이 얼굴 더듬어
살을 발라낸다
뼈와 칼끝 사이
무른 살이 갈라진다
턱뼈 밑으로 식칼이 올라와
혀를 도려간다
뼛국 물 우려낸 염소 대가리
멀리 던져진 염소 대가리
개가 물고 풀밭으로 돌아온다
개는 몇 번이고 찾아가
뼛국 냄새 없어질 때까지
핥고 돌아온다
파먹을 수 없는 깊은 살
바람이 발라먹는다
빗물이 뼛구멍을 씻는다
둥글게 팬 눈구멍과
희고 단단한 이빨을 갖게 된
염소 대가리
풀밭을 기다린다
「인디언의 女子」, 정용주 시인, 실천문학사,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