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시인, 대학 시절
우물우물 우울한 염소 한 마리 어슬렁거립니다. 끔뻑끔뻑 종이를 씹다 깜짝 놀라 도망치네요. 곧 잡으러갈 예정입니다. '대학 시절'이라는 제목의 기형도 시인의 시도 있습니다. 이 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데, 다소 단정한 몸짓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짙은 외로움이 묻어 있어 진은영 시인의 시와는 한 발만 겹쳐 다른 길로 갑니다. 대학이 주는 가장 강렬한 의미는 울타리입니다. 아직은 내 노동에 정식 가격표가 붙여지기 전입니다. 출발선 뒤에서 뛸 준비를 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선수들이 보입니다.
시절이 주는 의미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입니다. 시간은 일방적입니다. 내 등을 계속 떠밉니다. 진은영 시인은 총소리를 듣고 반대 방향으로 뛰어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아예 안 뛴 것 같기도 하구요. 기형도 시인은 총성이 울릴 때마다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시는 한 발은 겹쳤는데, 다른 길로 갑니다.
원칙은 사람보다 위대합니다. 원칙에 기대면 살아가기에 편합니다. 그 질적인 차이에 관계 없이, 어떠한 것이든 원칙이면 비슷한 효용을 줍니다. 입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길은 험난합니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던 주인공의 친구가 갑자기 큰 전투를 앞두고 가족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뭔지 알지요? 입체성을 띠게 해준 다음 퇴장시키는 건 우리에게 익숙한 전개 방식이지만 여전히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 시절은 그 시절로 남습니다. 두 작품 모두 날 선 칼로 마지막을 베었습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든 손에 쥔 것은 같았습니다. 작품에서 버릴 수 없는 단어는 '시절'입니다. 두 작품 모두 그렇습니다.
멜랑멜랑한 꼬리, 종일토록 종이, 시시한 시들, 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 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 담담하게 담배만. 여기 우물우물 우울한 염소 한 마리 잡았습니다!
대학 시절
내 가슴엔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
살고 있어
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
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
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
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시인, 문학과지성사,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