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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Jul 01. 2023

행복해질 수 있을까?

선생님이 아닌 엄마로 살기

   브런치 서랍에 처음 글을 쓴 게 2019년이었다. 아들과 힘겨운 하루하루가 3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아들은 방향키를 잃은 배처럼 제 갈 길을 못 찾고 아무렇게나 생활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꼬맹이다. 겨우 6학년.

  그 아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아들은 게임이 온 세상 전부인 아이였다. 입학을 앞두고 변해 버린 환경. 유치원 친구들을 다 잃어버린 상황. 아들은 나름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난을 일삼았지만 아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담임선생님은 꾸중만 했다. 심지어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에게 아침 출근길에 사진을 들고 와서 이게 뭐냐고 이러고 있다고 비난하셨다. 그저 뒤를 돌아보고 이야기를 좀 하고 있을 뿐인 아이 모습.


  난 그때 용감하지 못한 엄마였다. 그 선생님도 같은 학교 동료교사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담임으로서 학부모를 찾아왔으니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야 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잘못한 건 맞는데요. 겨우 4월을 보내고 있는 1학년 아이가 뒤를 돌아보고 떠드게  과연 아침부터 학부모에게 사진을 들고 와서 비난을 할 정도로 잘못된 일인가요? 아이는 성장하고 있고, 기본 생활습관과 규칙을 바로잡도록 알려주는 게 저학년 선생님의 역할이 아닌가요? 저희 아이 집에서 잘 가르치겠습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선생님이 감당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 말도 세월이 흐른 후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생각하면서 떠오른 말일뿐, 그 시절에 그 말을 못한 나를 가슴을 치며 원망할 뿐. 그 당시 나는 엄마가 아니었다. 그냥 선생님이고 그 담임선생님의 동료 교사였을 뿐이었다.

  아들에 대한 걱정에 앞서 동료교사에 대한 부끄러움, 선생으로서 나의 자질에 대한 부끄러움, 못난 사람이 아닌 줄 알았던 나에 대한 자괴감만 앞서 있었다. 아들의 마음 상태는 뒷전이었다.

 아들은 혼이 났다. 가뜩이나 학교에서 칭찬도 못 받는 아들을 내가 또 혼내고 있었다.

 당시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으면서도 엄마로서 나보다는 아들이 이상하다는 생각만 했다.

 선생님이 아닌 엄마로서 살았어야 했다. 하루 종일 선생 역할만 하고 있었던 나.


 그러고도 또 3년이 흘러버렸고 아들은 더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학교를 수시로 결석하고 현질을 요구하고 그 작은 손으로 엄마를 때리기도 하고 그 예쁜 입에서 험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들의 기질 탓만 했다. 죽을 것만 같았는데 죽고 싶어도 견딜 수 있었던 건 학교 아이들 때문이었다. 내가 부은 얼굴로 와도 눈치를 못 채고 종알종알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 때문에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밥벌이를 한다는 게 나를 죽지 못하게 만들었다. 억지로 깨서 출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지만 그 생활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상담을 거치고 병원도 갔다 안 갔다 반복된 생활이 이어졌고 아들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꼬맹이 같은 183cm의 애기 고등학생.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깜냥도 여건도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주말부부를 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힘든 건 힘든 줄도 모르고 스스로 슈퍼우먼이란 착각에 빠져 버틴 게 잘못이었다. 나와 기질이 다른 아들을 다루는 방법도 모르고 그저 밥만 주고 하루를 보내면 끝인 줄 알았던 게 잘못이었다. 여자와 다른 남자아이의 기질도 이해 못 한 게 잘못이었다. 기질은 예민했지만 모든 게 맑고 귀여웠던 아이를 입을 닫아버린 우울한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브런치에 글을 쓰던 2019년에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주변의 긍정적인 모습들을 쓰면서 배우고 싶었다. 이것저것 서랍 속에 글을 써넣었다. 엄마로서 성장하고 싶어서 아들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변화해 가는 모습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큰 변화는 없었고 결국 브런치 서랍 속에 글만 몇 편 남은 채 작가 신청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들은 변화되지 않았기에.

 뭔가 그럴듯하게 변화하는 엄마와 아들의 모습을 글로 쓰고 싶었던 내 욕심을 채울 수가 없었기에. 쓴 웃음이 난다.


  그렇게 먼지 앉은 글 세 편을 보내 브런치 작가 당선 메일을 받았다. 작가라는 말이 아직도 어색하고 나한테는 절대 안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모든 감정이 정화되는 걸 느낀다. 내 안의 화도 가라앉고 우울도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 글을 쓰면서 온통 아들 걱정에 집중되어 있던 생각도 글쓰기로 옮겨왔다. 나름 힘겨운 인생의 사춘기를 앓고 있는 아들도 적당히 멀어진 엄마의 관심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른다. 남편도 내가 조금 밝아졌다고 한다.


  행복한가 생각을 해보았다. 물질적으로는 그리 모자랄 것도 없다. 건강하신 두 부모님이 계시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남편은 나를 뜨겁게 사랑한다니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둘째는 밝게 친구들 사이에 어울리니 감사할 일이다. 아들은 마음을 닫고 있지만 약을 성실하게 먹으니 다행인 일이다. 학교 아이들은 온전히 나를 좋아해 주니 감사할 일이다. 민원을 제기하는 보호자도 없으니 감사할 일이다.

 감사할 일 천지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 본다. 엄마로서 아들이 사회 속에서 섞여 조화롭게 살긴 바라지만 현재는 무리로 보인다.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하기만 한데 방법도 못 찾겠다. 언니는 말한다. 브런치 독자님들도 말씀하신다. 천천히 안아주고 대화해 나가다 보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지금도 행복한 것 같지만 아들만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 같은 생활에 한줄기 빛이 언젠가 들어주기를. 과연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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