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에 불탄 0 선생
브런치 글쓰기보다 더 힘들고 무척이나 하기 싫은 학교생활기록부 서술형 작성을 또다시 해야 될 시간이 왔다. 방학은 7월 말이건만 관리자들 눈엔 교사들이 뭐가 그리 못 미더운지 수요일까지 통지표를 작성해서 내라고 한다. 나이스 시스템이 4세대 지능형으로 바뀌면서 메뉴 구성도 바뀌고 적응이 안돼서 가뜩이나 힘든데 쪼으고 쫀다. 이럴 땐 정말 관리자이고 싶다. 억울하면 출세하지 그랬니?
원활한 평가 작성을 위해 미리 준비 운동 시작.
본격적인 운동에 앞서 브런치 글쓰기로 손가락 준비 운동을 시작해 본다. 다다다닥 리듬을 타는 자판 소리. 브런치에 글을 쓸 땐 경쾌한 고음인데 통지표를 작성할 땐 우울한 저음이다. 모든 건 내 마음의 문제란 거지.
(널을 뛰는 내 감정에 대해서 말하니 남편은 그런다. 그게 당신이니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라고...)
1. 덤프트럭 운전사
저녁을 먹고 남편과 산책을 하러 나갔다.
우리 아파트 바로 앞엔 내년 4월 입주를 앞두고 신축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해서 조금씩 어두워지는 시간. 아파트 공사장 출입문 근처에 다다르는 순간 웅웅 거리는 큰 소리. 직감적으로 트럭이 나오는 소리 같아 옆에 걷던 남편의 팔을 잡았다.
웅 하고 남편과 50cm 정도 간격을 두고 지나가는 대형 덤프트럭.
남편 몸을 잡지 않았다면 오늘 과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도 깜짝 놀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을 떼지 못한다.
저 높은 자리에 앉은 트럭 운전사는 무슨 마음인지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자신이 잘못한 걸 아는 건지, 예의 없이 우리를 비난하고 싶은 건지. 그의 마음은 알 수 없으나 과부가 될뻔한 상황 앞에서 내 마음도 진정이 안된다.
잠시 몇 걸음 떼다가 이 무서운 상황을 발생하게 만든 동부건설에 화가 난 0선생. 공사장으로 다시 돌아와 내부로 들어가 본다. 컨테이너 박스에 아저씨 한 분이 계신다.
정의감에 불타는 0선생. 똑똑 문을 두드린다. 세 번의 두드림만에 문을 여는 아저씨. 얼굴이 벌건 것이 술을 드셨나 싶기도 하다.
"아저씨, 방금 트럭이 지나가는데 신호수도 없고 저희 남편 죽을 뻔했어요."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린 듯 밖으로 나온다.
"아 트럭이 안 나가길래 이때까지 기다리다가 들어갔는데, 놀라셨어요? 아유 죄송합니다."
대충 그렇게 마무리되는데 내용을 들어보니 아저씨가 직무유기하신 거구나.
책임자를 찾아서 추궁하고 싶을 정도로 집요해지는 0선생. 하지만 참는다. 저분도 한 가족의 가장이려니 잘못 말했다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니.
하지만 덤프트럭 운전사 아저씨. 당신은 오늘 하루 종일 우울했던 나를 한방에 두들겨 깨우며 나의 정의감에 활시위를 당겨놓았으니. 이대로 넘어갈 순 없다. 무슨 수를 찾아야지.
2. 아파트 관리사무소
우리 아들을 비롯한 아파트 아이들의 안전이 걱정된다. 그 길을 지나서 초, 중, 고 통학을 하는 아이들이 한둘인가. 어느 아이가 자전거라도 타고 그 순간 지나갔으면 아마 그대로 즉사했으리라.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사무소 직원의 태도. 니 남편이 죽을 뻔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시큰둥한 태도. 어랏. 이건 또 뭐래.
다시 설명한다.
"우리 아파트 아이들이 다 그쪽 길로 통학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관리사무소 측에서 공사업체나 동부건설에 민원을 넣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소심한 나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어쩌다 필 꽂히면 그야말로 잔다르크 유관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사람으로 돌변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아파트 내부 관리를 하는 곳인지 외부 일까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럼 분진이나 소음 때문에 소송 걸고 소송비 받아내고 그런 일은 하면서 아이들 안전과 관련된 문제는 항의를 못한다는 겁니까?"
"네 그건 아파트 외부 일이니까요."
머릿속에 험한 말들이 맴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단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사람이 죽을 뻔했다는데 뭐 이딴 걸로 전화를 걸었냐는 뜨악한 표정까지 느껴지는 느릿하고 감정 없는 말투. 아파트 외부 일을 나한테 왜 말하느냐는 귀찮아하는 눈빛. 보지 않아도 전화기 너머로 다 전해진단 말이지.
그래도 어쩌랴. 그대도 성실한 대한민국 일꾼이니. 이 저녁에 내가 기분 상하게 해서 하루를 망치게 할 순 없으니 공손하게 전화를 끊는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사무소 직원분, 덤프트럭 아저씨 오늘 당신은 0선생의 정의감을 건드렸단 말이지.
BUT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없어서 다음부터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만 들뿐.
과부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릴 뿐.
불타오르는 정의감은 그냥 훅 꺼버리기로.
똑같은 말도 표현 방식에 따라 전달하는 느낌이 달라지는데, 아파트 외부 일이니 아이들 안전이 걸려 있건 말건 상관없는 말을 왜 나한테 하냐는 태도의 관리사무소 직원.
이왕이면 공감 좀 해주며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 놀라셨겠어요. 그렇네요. 우리 아파트 아이들 다니는데 위험하네요. 그런데 어쩌죠. 저희가 관여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라서요. 미안합니다. 도움을 못 드려서."
요 정도라도 이야기해 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전화통화였다.
아쉽게도 불타오르다 꺼져버린 0선생의 정의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으니
항상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