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속에 섞여 살자
안아주기 스물여섯 번째 날
학기말 평가는 마무리 지었으나 업무가 학기말과 겹쳤습니다. 처음 하는 업무이므로 꼼꼼히 살폈어야 되는데 일의 순서를 뒤바꾸고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사전 의견 조사 후 회의를 개최해야 되는데 놓쳐버리고 회의를 먼저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아차 싶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버렸고 다음날 회의를 생각하며 혼자 머리를 쥐고 고민하다 답답해 브런치에 들어왔더니 여지없이 김밥 사진이 수두룩합니다.
집에 가서 김밥을 해줘야겠네 생각을 하며 퇴근을 해버렸습니다. 일에 대해 머리 아파해 봐야 실수가 해결도 안 나니 방향을 전환해 버리기로 마음을 내렸습니다. 흔한 말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거니 어찌 되겠지 생각해 버리기로 했습니다.
이런저런 재료들을 볶고 썰고 김밥을 싸기 시작했는데 뭔가 허전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빠졌는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준비한 재료로 김밥을 싸고 썰려는데 김치를 넣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큰아들은 김밥에 김치를 꼭 넣어줘야 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퇴근한 남편도 김치 없는 김밥에 허전함을 표하며 김치를 얹어먹네요. 작은 아들은 오이가 들어가서 목이 덜 막힌다고 합니다.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은 큰아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되나 고민했습니다. 2년 반 뒤면 대학 갈 아이의 수능 걱정이 아니라 고작 김밥에 김치가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는 제 모습이 조금 차량 맞기도 하지만 어쩌겠나요. 우리 아들을 키운 것도 저고 입맛을 저렇게 만든 것도 저이니 제 상황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아들이 오면 김밥을 썰어주려고 기다렸는데 10시가 훌쩍 넘어도 아들은 오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잠자리에 들면서 냉장고에 김밥을 잘 싸서 넣었습니다. 11시가 다 되어서 들어온 아들입니다. 선잠을 자고 있는데 남편의 큰 소리가 들려옵니다.
"가족인데 들어오면 들어온다 나가면 나간다 말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아빠를 그렇게 무시해?"
잠결에 정확히 들리진 않지만 온갖 언짢음을 다 쥐어짜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아들을 훈계하고 가르치자고 한 것이지 소리를 지르라고 하진 않았건만 또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나가서 말려야 되나 고민하다가 그냥 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편이 나름의 권위를 세우고 혼내는 상황에 끼어들어 말리면 남편 말의 힘이 없어져버리니까요. 사실 소리를 지르는 순간부터 부모 말에 힘이 없어진다는 걸 남편은 화난 순간 못 깨닫고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아마 돌아서서 후회하겠지요. 남편의 한바탕 잔소리 후 아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방에 들어온 남편에게 설명했습니다.
"훈계를 하란 거지 소리를 지르란 게 아니잖아. 이때까지 충돌이 두려워 중단했지만 이제 가르칠 걸 가르치자는 거지, 소리를 지르란 게 아니야, 여보. 가뜩이나 마음 불편하고 부모한테 등 돌린 아이한테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저한테는 큰 산이 세 개 있습니다. 저, 아들, 남편. 저부터 넘어야 될 산이지만 이제 조금 안정되어 가는데 남편은 여전하고, 우리의 행동에 따라 아들은 더 악화되면 악화되지 나아지진 않을 겁니다.
비록 김치가 들어가지 않은 김밥이지만 아들한테 먹이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을 안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전날 한 김밥을 꺼내보았습니다. 김밥천국 김밥은 냉장고만 들어가면 딱딱해지는데 썰어서 먹어보니 딱딱하지 않습니다. 조금 차가울 뿐인데 먹지 못할 정도도 아니네요.
혹여 김치가 들어가지 않은 김밥을 거부할까 봐 라면도 급하게 끓여냅니다.
"00야, 아침 먹자."
깜짝 놀라 깨는 아들입니다. 늦게 들어왔으니 피곤할 겁니다. 분주히 준비하러 왔다 갔다 하면서 보니 김밥에 손을 안 대고 있습니다.
"00야, 먹어봐. 김치는 안 들어갔지만 맛있어. 어제 다들 맛있다고 잘 먹었어."
그제야 아들은 김밥을 먹어보네요. 별 말이 없는 걸 보니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라면은 맛없어. 이제."
미안하네요. 정말 영양가 없는 라면. 힘들면 수시로 끓여줬으니까요. 방학 때는 라면 없는 식단을 위해 애써야겠습니다.
출근을 하기 전 아들 방에 들어갑니다.
폰만 열심히 쳐다보며 게임 삼매경입니다.
"00야, 우리 가족이잖아. 가족은 서로 잘 어울려서 위해주고 살아야 되는 거잖아. 네가 성년이 되기 전에 부모랑 같이 살아야 되는데 들어오고 나갈 때를 알리지 않으면 엄마 아빠는 걱정되거든. 그리고 외출하고 오면 인사는 하자. 지금 당장 독립하고 싶니? 그게 아니라면 가족인데 아는 척은 하고 살아야지?"
눈도 쳐다보지 않는 아들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제 말만 길어집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긴 하네요.
"응"
저는 '응' 한마디로도 기쁩니다. 더불어 아빠도 좀 차분하게 말을 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엄마랑 안아보자."
벌떡 일어납니다. 오늘은 팔로 엄마 몸을 감쌉니다. 아들이 조금 풀린 것 같아 또 한 번 기뻤습니다.
"어제 늦게 들어와서 용돈 이야기 못했는데 오늘 하도록 하자."
대답 없는 아들이고, 늦게 들어와서 또 못할 대화 같지만 조금씩 조금씩 엄마인 제가 다가가야 된다고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니다.
둘째 아들도 기분 좋게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사랑해. 하루 잘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