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일으켜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의 시작은 항상 욕실, 그다음이 거실, 아이들 방, 부엌, 내 방과 서재는 맨 마지막이다.
엄마의 청소 시작은 항상 공용 공간이다. 공용 공간부터 시작해서 개인 공간으로 끝나는 청소 루틴이다 보니 안방 화장실은 청소를 못하기가 일쑤다. 거의 쓰지도 않는데도 곰팡이가 끼고 먼지가 앉는다. 봄에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수전이 죄다 녹슬어 있었다. 쓰지 않는다고 겨우내 방치해 뒀더니 결로 현상 때문에 여기저기 녹이 앉아버린 것이다. 쓰지 않는다고 더러워지지 않는 건 아니니 항상 여기저기 보살펴야 되는 엄마의 집안일 몫은 끝이 없다. 마지막 루틴, 안방 화장실도 청소를 해야 되건만 지치고 너덜 해진 몸은 안방 공간 청소까지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가장 깨끗하지 못한 곳은 내 화장대와 안방 화장실이다.
이렇게 엄마들은 모든 중심이 가족에게 있다.
밥을 해도 내가 먹고 싶은 반찬보다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 위주로 하게 된다. 외식을 가도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식당에 가서 메뉴를 정할 때 아이들이 고른 것을 보고 그건 별로야, 이거 먹자 하는 남편을 보면 이해가 안 갈 때가 많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중심인데 아빠는 그렇지 못한 것인지 우리 남편만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휴가 장소를 정할 때도 아이들의 의사를 꼭 묻는다. 휴가를 가서 아이들이 지치면 안 되니까 말이다. 즐겁자고 가는 휴가가 다툼과 짜증으로 결론 나지 않으려면 아이들의 의사도 중요하다.
그렇게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일상의 중심이 가족에게로 가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 중에서도 아이에게로 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잘 사는 건지는 확신이 없다. 자식을 하나 둘 낳는 세상이다 보니 나보다 더 아이 중심인 가정도 많으니 이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하지만, 70년대생인 나는 80년대생과는 또 다른 어정쩡하고 고루한 생각의 소유자라, 보수적인 생각마저 다 떨칠 수는 없어서, 이러다 애 버릇 망친다는 생각 속에서 갈팡질팡 할 때도 많다. 점점 일상의 중심이 가족에서, 가족 중의 아이에게로 가고 있는 것이 다소 걱정도 앞서지만 저출산 국가에서 그렇게 아이를 낳고 아끼며 사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정도의 차이일 뿐, 가족 중에서도 중심이 어른보다 아이로 이동했을 뿐, 예나 지금이나 엄마들의 중심은 가족이다. 세상이 아무리 확 뒤집어져도 엄마들의 중심은 가족일 것이다.
밥상은 아버지 좋아하는 것 위주였던 어릴 적. 어른들이 수저를 먼저 들고 나서야 먹어야 했던 식사 시간. 주무시는 아버지 머리맡을 잘못 지나갔다가는 혼나기 일쑤였고, 아버지가 덮고 자는 이불만 잘못 밟아도 혼이 나던 시절이었다. 이제 팔순이 넘은 엄마 아버지는 딸이 놀러 가면 피곤하다고 한 곁에서 자라고 말씀도 해 주시고 부모 앞에 드러눕는 것도 개의치 않으신다. 세월이 바뀌어서 부모님 생각도 바뀌신 것이다. 어릴 적에 오히려 그렇게 살갑고 무섭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자식을 대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도, 그렇게 클 수밖에 없었던 우리 형제들도 다 짠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우리 자식들이 컸을 때는 또 어떤 가치관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을까? 변화하는 세월 속에 그때그때 가치관에 잘 적응하며 나이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키만큼 마음이 자라지 못한 우리 아들의 중심은 게임이다. 힘든 몸을 일으켜 밥을 해주고 조금이라도 게임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쓰레기를 버리러 오라고 시키고, 좋아하는 냉동 바나나를 갈아 바나나우유도 만들어 주지만 먹는 것도 잠시, 쓰레기 버리는 것도 잠시일 뿐 아들은 종일 게임이다. 아들의 중심에 언제 가족이 들어올 수 있을까. 아니 가족이 아니어도 좋으니 본인이라도 본인의 중심에 왔으면 좋겠다. 본인을 아끼는 게 뭔지 본인이 성장하는 길이 뭔지 깨닫고 본인의 중심에 자기를 두는 아들 모습을 언제쯤 볼 수 있을지 앞이 까마득하다. 아픈 몸과 함께 오늘도 눈물이 차오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