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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반장이 되기 위한 몸부림

by 나무 향기

학급 임원 선거일. 당일날 퇴근할 때까지 아무런 톡이 없어서 떨어졌나 보네, 나가긴 했나라는 생각만 하고, 행여 떨어졌을 경우 실망했을 둘째의 생채기를 일부러 건드릴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집에 올 때까지 묻지 않았다. 퇴근 후 바쁘게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학원 갔다 온 둘째가 돌아왔다. 얼굴이 다 가리는 엄마 모자를 눌러쓰고.

떨어졌구나, 속상했구나, 어떻게 달래야 되나 가슴 한편이 철렁했다.



둘째 아들은 형보다는 낫다. 낫다는 말을 자식에게 들이대는 것조차 부모로서의 기본이 안된 것도 같지만 어쩌랴.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엄마. 둘을 바라보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는 학원도 다니고 친구들도 많이 만난다. 엄마가 힘들어하면 인지하고 위로도 할 줄 안다. 늘 생긋 웃는 얼굴로 할 말을 대신하는 센스도 있다.


큰아들은 그냥 사회구성원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자라길 바라지 대한민국 엄마들이 바라는 일정 수준의 기대라는 건 이미 던져버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둘째에게는 일정 수준 기대를 하게 된다. 기대를 안 하면 엄마 노릇 안 하는 것 같은 강박감도 한몫을 한다. 방임형 부모, 억압형 부모, 통제형 부모 어떤 것도 되기 싫은 상황에서 애를 던져둘 수도 없다. 그렇다고 주물 틀에 넣으면 완성되는 예쁜 모형들처럼 그렇게 빈틈없는 틀을 만들어줄 여력도 이 엄마는 없다. 에너지가 달리고 열정도 부족하다. 하지만 정도껏 해야 될 일들에 대해선 걱정을 늘어놓는 편이다.


둘째는 보내고 싶은 고등학교가 있다. 지역 고등학교가 평준화된 지는 10년이 넘어가는 거 같다. 내가 살던 대구는 80년대 때도 평준화였지만 여기 와서 보니 평준화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 말이 많았었다. 평준화는 되었지만 이전 비평준화 지역이었을 때 소위 명문고들에 대한 인식은 있고 이곳도 특목고는 있으니 아직 중 1인 둘째에게는 정도껏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


큰 아이는 기본 베이스가 제대로 안되니 가산점 같은 것에는 신경을 안 썼지만 둘째는 아직 지필 시험도 치르기 전이라 교육과정 설명회에서 들었던 가산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가산점 받을 항목은 뻔하고 둘째에게 학급 임원이 되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둘째는 임원 되면 뭐해줄 건데라고 아이들 특유의 조건 협상에 들어간다. 조건은 비밀. 어쨌든 조건이라도 내민다는 건 할 마음이 조금은 있다는 것이니 안심. 아이가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고, 조건을 거는 것이 얼마나 비교육적인지 알지만, 둘째에게 임원 출마는 인생 경험도 될 거 같아 큰 기대 없이 권유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임원 선거 나갔어?"

"응."

"모자는 왜? 답답해. 실내니까 모자 벗어."

"아, 안돼."


이야기를 들어보니.

반장과 부반장 중 한 번만 출마가 가능하다고 한다.

반장 선거를 나가려니 반의 범생이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딱 보니 자기는 떨어질 판국이니 반장 선거는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반장 선거에 나갔더니 반장 선거에 나왔던 범생이들이 더 이상 출마가 안되니 후보는 단 두 명.

여학생과 본인 한 명.

아들의 전략이 먹혀드는 순간이었다.


아들은 여러 가지 모범적인 공약을 3가지 내걸고 4번째 공약을 내밀었다. 그야말로 숨겨진 강력무기였던 것이다. 요즘 뜨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핵폭탄 같이 여학생과 본인의 세 가지 공약을 모두 무너뜨릴 역대급 무기였으니.


두구 두구 두구...



그것은 바로 부반장이 되면 삭발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중 1. 어떤 나이인가?

구르는 잎만 봐도 깔깔 웃을 나이이고, 북한괴뢰군도(80년대 어마무시한 반공교육을 받은 엄마는 이 표현이 익숙하다.) 무서워한다는 중 2를 향해 달려가는 나이이며, 얼토당토않은 일들을 벌이고 계획하며 뭔가 멋진 어른이 되어간다는 착각에 빠질 나이 아닌가?


삭발 투혼은 초등학교 때도 걷지 않았던 임원의 길로 우리 아들을 인도했으니 기뻐해야 되나 슬퍼해야 되나?


나름 전략적으로 범생이들과의 대결은 힘들 것 같아 포기하고 부반장에 나갔으며, 제대로 된 공약은 밑밥이었고 중 1들에게는 한 방 빵 터질 무기를 던진 아들내미.


18대 12로 승리를 거두고 하교하자마자 친구들이 끌고 간 학교 인근 미용실에서 삭발을 감행했다. 중 1 요 녀석들은 보란 듯이 아들을 끌고 미용실에 갔고, 지나가는 다른 반 아이들까지 불러들이며 우리 둘째의 부반장이 되기까지의 길들을 무슨 영웅담 늘어놓듯이 까발렸으니, 중 1은 역시 중 1답다.


그날 이후 우리 아들은 전교 1학년 모든 학생이 알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학교선생님들은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모자를 쓰고 수업을 듣도록 하고 있으니 복도를 걸어도 급식실에 가도 눈에 띄는 우리 아들. 심지어 생전 본 적 없는 다른 학교 아이까지도 아는 척하는 날이 있더라고 하니, 이렇게 유명인사가 된 아들의 상황을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웃픈 며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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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학원선생님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더 짠하다.

하필 부반장 선거에서 같이 나온 여학생은 둘째의 전 여자 친구이었다고 한다. 두 번이나 사귀자 했다가 결국 헤어지게 된. 꼬맹이 녀석들의 사귀자는 대체 무슨 의미인지 늘 의문이 들지만 그들의 세계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를 못 할지도 모른다.

학원선생님이 들은 바로는 전 여자 친구를 떨어지게 하려고 내민 공약이라고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다고 한다.

한 때 아들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의기소침해 있었던 날이 많았음을 알기 때문에 진실을 물어볼 수는 없다. 전 여자 친구의 이름만 꺼내도 그 생글 웃던 아들의 표정이 돌변하는 걸 수차례 겪은 터라 물을 수가 없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삭발 투혼까지 발휘하며 얻은 부반장 자리.

제발 아들이 학급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이를 계기로 친구도 더 사귀고 범생이 근처라도 가도록 노력하기를, 엄마는 욕심내어 본다.


하지만 오늘. 아들은 아침 9시가 되기 전에 피시방에 가버렸다. 엄마 같은 범생이 아들들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인지? 한숨도 나지만 나름의 전략으로 부반장이 된 아들의 까까머리를 보고 있으면 가뜩이나 작은 눈이 하회탈처럼 돼버리는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엄마인가 보다. 사랑한다. 둘째야.


한 줄 요약 : 목적 달성을 위해 때로는 무모함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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