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유난히 길다. 2023년은 여름만 계속될 것 같은 느낌마져 든다. 브런치에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데 도무지 가을이 다가올 것 같지 않다. 아침 공기는 좀 시원해서 가을이구나 싶었는데 낮이 되니 햇살이 쨍하다.
더위도 잘 타지 않았었는데 올여름은 더위를 못 견디겠고, 가을도 실감나지 않는다. 매일 덥다만 달고 사는 느낌이다. 이제 갱년기 증상이 슬슬 시작되는 건지 전에 없이 땀이 많이 난다. 이 더운 날 주방 앞에 서서 음식을 하는 건 정말 고된 일이다.
늘상 비슷한 메뉴로 차려지는 밥상을 불평 않고 먹는 아들이 이럴 땐 고맙다. 물론 살짝 불평이 있을 때도 있다. 드디어 날선 말을 던진다.
"고기 좀 그만 줘. 맨날 고기야?"
아침 식사 시간에 훅 치고 들어온 말에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아들이 평온하길 바래서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고기만큼 편한 반찬도 없건만 고기 빼면 무엇을 해줘야 되나? 카레라이스, 김치찌개, 볶음밥, 오므라이스, 김치전, 감자전, 볶음밥, 미역국, 소고기국, 된장찌개 등 비교적 하기 쉬운 국과 반찬들을 돌고 돌아 이제 드디어 김밥을 또 싸 줄 차례인가?
이런 고민을 덜어줄 반가운 선물이 도착했다. 한식 뷔페 한상 같은 반찬들을 언니로부터 받았다. 9가지 종류에 양도 엄청나다. 거기다가 삶은 땅콩도 함께 보냈다. 동생이 게을러서 삶고 찌고 이런 건 안하는 걸 우찌 알고.
테트리스 맞추듯 스티로품 박스에 빈틈 없이 그득 그득 채워보냈다. 빈 공간은 매실액과 고춧가루도 함께 채워서.
결혼하기 전엔 언니가 해 주는 함박스테이크나, 손만두를 많이 얻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언니는 조카들 해 주는 김에 많은 양을 해서 친정 식구도 먹을 수 있게 갖다 주곤 했었다. 만두를 보면 언니 손만두가 떠오르고 냉동 포장 햄벅스테이크를 사면 언니가 해 준 음식 맛이 입안에 돈다.
언니의 반찬은 퇴근 후 지친 얼굴에 미소를 불러온다. 반찬을 하나 하나 챙겨보았다.
콩자반은 추억이다. 언니가 둘째를 어릴 때 봐 준 적이 있다. 그 때 둘째는 이모의 콩자반을 그렇게나 좋아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이모 콩자반에 대해서 말해 주면, 말도 못하던 시절인데도 이모의 콩자반을 정확히 기억한다. 음식이 주는 기억은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게 확실하다. 그 이후로 이 엄마가 계속 콩자반을 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을. 영속성이 없는 콩자반에 대한 기억은 콩자반에 대한 입맛마져 잃어버리게 했다. 요즘은 잘 먹지 않는다. 안타깝다.
파김치와 도라지는 어려움이다. 도라지를 좋아하지만 엄마와 언니가 해 주는 새콤하면서 쌉싸르한 맛은 도무질 흉내내어지질 않는다. 파김치는 파를 다듬는 것부터 번거롭고 수고를 많이 해야 되는 음식이다. 그래서 아예 시도를 안하는데 이렇게 얻어 먹게 되면 그 맛에 어떻게 보답해야 되나 곰곰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진미채는 사랑이다. 아이들이 젤 좋아하는 반찬 중 하나이고 언니가 해 주는 진미채는 매콤 달달한 맛이 있다.
우엉조림은 번거로움이자 건강함이다. 뿌리 채소가 건강에 좋다는 걸 알고 뿌리채소에 대한 거부감이 없지만 해 먹기가 쉽지는 않다. 우엉을 사 와서 손질도 안한채 말려 버린 게 어디 한 두번이었던가? 껍질을 다듬고 잘게 썰고 볶는 과정의 지리함을 견뎌야 된다. 하지만 완성된 짭조름한 우엉조림은 건강해진다는 느낌을 절로 들게 하는 소중한 반찬이다.
절인 제육볶음에 손이 많이 가는 나물 반찬까지. 식탁을 그득히 채운 한식 뷔페 한상이다.
제육을 달달 볶아 이모의 반찬과 함께 저녁을 차려줬다.
"엄마, 이게 다 이모 꺼야? 엄마가 한 건 없네?"
음. 으흠.
"그러네. 하지만 밥은 엄마가 했는 걸. 맛있게 먹어. 이모가 이렇게 반찬도 많이 해주고 고맙지?"
"엄마 이모한테 돈 줬어?"
돈으로 정성을 치환하는 건 감히 할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이모의 수고로움을 아들도 느끼는 모양이다.
"응, 이모한테 화장품이라도 사 드려야겠네."
아들은 빙그레 웃는다.
비록 엄마의 손맛은 아니지만 음식에 대한 추억을 머리 속에 새기고, 음식 이름만 말하면 혓속에 맴도는 그 맛을 몸에 새길 우리 아들. 미안함이 들 때가 아주 많다. 우리 남편처럼 엄마의 음식에 대한 추억이 없는 아들로, 엄마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없는 아들로, 아플 때 떠오르며 먹고 싶은 엄마 음식이 없는 아들로 키우고 있는 것 같아서.
음식에 대한 추억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몸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아름다운 기억이건만.
택배로 배달된 소중한 언니의 반찬들 앞에서 다이어트를 해야 되는 안타까움이란. 그래서 맥주 한 캔을 뜯어 파김치 도라지를 안주 삼아 열심히 먹었다. 취한다. 맛있다. 왠지 건강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