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베란다에 있던 화분들을 봄을 맞이하며 싹 없애버렸다. 생명이 있는 존재인데 무참히 없애기가 안타까웠지만 결국 제대로 돌보지 않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고 베란다만 지저분해 보여서 정리를 했다. 그리고 남겨 놓은 것은 신혼 초 집들이 때 받은 산세베리아에서 번져 나간 산세베리아 화분 3개와 스투키 화분 2개였다.
3, 4월은 신학기 적응하느라 정신없고 5월은 각종 가정의 달 행사로 분주했고 6월부터는 브런치에 글 쓰는 데 빠져서 앞베란다를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앞베란다에 빨래 걸이가 있긴 하지만 건조기를 쓰고 건조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옷들은 거실의 소형 건조대에 걸어두면 되니 앞베란다 쪽을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꽃화분은 다 정리했고, 산세베리아는 물을 안 줘도 잘 자라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널을 뛰는 기분이 지난주에는 평온했다가 어제 또 우울해지기 시작해서 정신은 깼지만 일어나기 싫어서 오늘 늦잠을 잤다. 눈은 퉁 부은 채로 애들에겐 먹을 것을 대충 챙겨주고 TV를 켰지만 볼 것도 없었다.
날은 서늘하다. 재채기가 계속되는 걸 보니 가을이 온 게 분명하다. 일주일 전과는 분명 다른 가을 날씨다. 이 좋은 날씨에 등산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집순이는 또 혼자 나갈 용기는 없다. 축 처져 있다가 또 최면을 건다. 청소라도 하자. 청소를 하다 보면 일체의 잡념도 사라질 거야.
정신을 차리니 밖에서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눈에 보인다. 항상 현재에 깨어있어야 하건만 깨어있기가 쉽지 않다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며칠 흐렸던 날씨로 세탁하지 못했던 원피스들을 빨고 베란다 천장 건조대에 걸러 갔다. 드디어 산세베리아가 내 눈에 들어온다.
살면서 이런 산세베리아를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바빠도 산세베리아를 이렇게 방치한 적은 처음이다. 잎이 쪼그라들었다. 시들어버린 잎, 쪼그라 버린 잎, 이건 산세베리아가 아니라 무슨 시들어 버린 파를 보는 느낌이다. 지난 반년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중간에 물을 한 번씩 준 기억이 나건만 올여름 그 더위 동안, 아마 6월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한 번도 주지 않았던 거 같다. 대구에 살았기에 웬만한 더위를 잘 견디는 나조차도 더워했던 올여름의 햇빛을 온몸으로 맞은 산세베리아가 그 더위를 견디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세베리아 한쪽에 몇 년에 한 번씩 피는 꽃이 피어 있다. 꽃대를 보는 순간 미안함이 더 몰려온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돌보지 않았더니 스스로 살고자 꽃을 피운 산세베리아가 측은하면서 대견하기까지 하다. 꽃대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고 맺힌 상태이다. 내일 흰꽃을 피울까? 모레 피울까?
급히 물을 듬뿍 주었다. 같이 사는 생명인 식물에게 무심했던 사실이 미안하다. 내가 우울하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로 현재를 살았다면 이렇게 등한시하지 않았을 건데.
아들들이 생각난다. 엄마가 늦잠을 자서 작은 아들은 컵라면을 혼자 먹고 피시방에 가버렸다. 컵라면 끓이는 소리에 깼더니 엄마 한 번쯤은 그냥 통 크게 1만원 좀 넣어줘라며 엄마를 꼬신다. 넘어가줘야지 어쩌랴. 저렇게라도 의사 표현을 하는 아들이 고맙다. 큰 아들은 뒤늦게 챙겨주는 밥을 먹고 게임 속으로 빠졌다.
작은 아들의 시험 준비를 해줘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도 내 마음 챙기기도 바빠 내버려 두고 있다. 큰아들은 시험 때마다 매번 옆에서 일종의 과외를 해 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작은 아들에게 그렇게 해준다면 아마 시험을 잘 칠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지만 사실 귀찮다.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큰아들을 그렇게 억지로 꾸역꾸역 단타성 공부를 시켰다고 해서 큰아들의 공부 습관이 잡힌 것도 아니다. 그냥 꼴찌만 면할 성적으로 억지로 고등학교를 갔고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형성되지 않은 아들은 그때까지의 공부가 끝이다. 고등학교를 가면 뭐 하나? 결국 모든 걸 손에서 놓았다. 차라리 친구들이 가는 고등학교로 보냈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억지로 만들어준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자식이 아니라는 걸 큰아들을 보면 뼈저리게 느낀다. 결국 엄마가 방향을 제시해도, 엄마가 좋은 길로 끌어준답시고 노력해 봤자, 크면 클수록 자식은 그냥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때론 일부러 엄마가 원하는 길로 안 걸어가려 한다. 반항의 시작이다.
작은 아들은 한 번도 옆에서 공부를 봐준 적이 없지만 부반장도 하고 친구도 잘 사귀고 그렇게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다.
끌어준다고 해서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안 끌어준다고 해서 잘못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큰아들의 삶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늘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어제 대학교 가는 차비를 용돈으로 넣어달라는 걸 안 해줬더니 또 화살 같은 말을 왠만한 부모라면 절대 용납하지 못할 말을 나에게 쏘았고, 퇴근하면 또 싸움이 붙겠구나 했지만 의외로 아들은 담담했다. 그렇게 정말 병아리 발걸음으로 철이 들어가는 아들을, 나무늘보의 움직임을 보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어야 되는 게 답답하지만 몇 년 동안 눈물 매일 흘리던 날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감사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산세베리아를 돌보지 않고 내버려 뒀더니 스스로 꽃을 피웠다. 포동 포동한 잎으로 반짝반짝 빛날 때는 피지 않던 꽃이 맺혔다. 점점 커가고 있는 아들도 때론 멀찍이 서서 지켜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 꽃을 피울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 본다. 내 잔소리와 훈계로 어차피 달라질 것이란 기대는 전혀 없기에 도리에 대해서 계속 말은 하더라도 기대는 않고, 스스로 달라질 날을, 산세베리아처럼 물 안 주는 주인이 답답해 스스로 꽃 피울 날을 기다려 보고자 한다.
오늘은 대청소를 해야겠다. 현재에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 생각이 꼬리를 물 땐 단순하지만 땀 흘리는 청소가 생각을 끊어내는 좋은 해결책이다.
비쩍 말라서 꽃대를 피운 산세베리아가 나보고 정신차리라고, 정도껏은 주변을 돌보지만 때론 내버려 두는 것도 필요하니까, 둘 사이에 조화를 잘 이루라고, 머리를 땡 하고 치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