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당일 친정으로 가야 되는데 연휴가 길어서인지 일찍 준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번 추석은 왠지 고향 가는 것도 설레지 않고 집에서 쉬고만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추석 연휴 전날 늦게서야 남편이 근 20일간의 출장에서 돌아왔고 그동안 이래 저래 혼자 버티던 에너지가 소진이 되었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어서였다. 왜 남편이 없으면 혼자 살지 못하나 생각하니 독립적이지 못한 인간 같아 속도 상했다. 물론 그렇게 살 거면 결혼이란 걸 할 이유도 없겠지만 남편이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 독립적으로 살 줄 알아야 되건만 그게 마음부터 안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편이 있지만 없는 것 같이 살아나가야 되는 것도 내 팔자인가 싶다. 팔자라는 말이 너무 싫었는데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어떻게 헤쳐나가야 되나 생각하지만 늘 답은 보이지 않고 마음만 힘든 날들이 많다.
연휴가 시작되는 날 둘째는 친구들을 만나고 5시쯤 집에 들어왔는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몸이 안 좋았던 것이다. 열이 나기 시작하고 기침을 했다. 종합감기약 해열제를 먹였다. 추석 당일 아침에 일찍 깨서도 열이 난다고 했다. 38도가 넘어서길래 해열제를 또 먹였다.
남편은 추석 연휴 첫날 시차로 인해 종일 잠만 자다가 추석 당일 새벽에 깨서 밤을 꼴딱 새우고 일찍 일어나 귀성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기 싫었는데, 그냥 늦게 출발하고 싶었는데 아이가 열이 나서 깨우는 바람에 일찍 일어났다. 해열제를 먹이니 열이 떨어져서 괜찮겠지 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남편이 빨리 준비하라고 엄청 채근을 한다. 평소답지 않다. 차 막히는 게 싫은 것이다. 운전을 내가 하면 되지 않냐고 내 차를 끌고 가자고 하는 것을 시작으로 말다툼이 이어졌다. 긴 연휴를 싸움으로 시작하니 참 부모답지 못하다.
일찍 출발했더니 11시 조금 넘어 도착했다.
친정은 차례를 지내고 막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싸움의 여파로 부모님을 뵙고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엄마 나물밥과 차례음식을 맛있게 먹고 다 같이 티브이 보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오후가 되었는데 아이가 열이 39도까지 올라갔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아픈 것에 무심한 편이다. 해열제를 또 먹이고 열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부모님은 병원을 가라고 하시는데, 응급실 빼곤 당연히 모든 병원이 안 할 거라 생각해서 그냥 해열제만 먹였다.
큰아이 세 살 때 응급실 갔다가 기다리기만 세 시간 가까이하고 남편이 큰소리 내서 겨우 진료받은 경험이 있고 우리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잔병치레를 하지 않아서 응급실 갈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둘째 언니가 오고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아이의 열은 잡히지 않았다.
무심한 내가 드디어 병원을 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물수건으로 닦아주겠다고 한다. 부모님은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계속 말씀하지만 남편은 묵묵부답이다. 고집을 피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걱정은 늘어지시고 아이의 열은 39.4도까지 갔다. 남편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 생각이 없고, 남편의 카니발을 한 번도 운전하지 않았던 나는 엄두가 안 난다. 결국 12시가 다 되어서 언니가 운전해 응급실에 갔다. 남편은 술도 조금 마셔서 운전이 안되기도 했다. 새벽이라 생각보다 순번은 빨리 왔다. 코로나 독감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해열 주사를 맞았더니 이십 분 만에 땀이 주르륵. 아이는 그제사 배가 고프다고 한다. 다행히 코로나도 독감도 아니었다. 연휴 삼일째 문 여는 이비인후과가 있어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야기를 꺼냈지만 남편은 응급실에서 약 받았으니 안 가도 된다고 한다. 결국 아이는 연휴 삼일째 저녁에도 열이 많이 났고 또 응급실에 갔다. 임시처방인 응급실 약이 큰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우린 정말 너무 무덤덤하고 무심한 부모 같다.
남편에게 원망의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안다.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택시라도 타고 가거나 남편을 설득하면 되었을 것을 그 노력도 안 한 건 나를 탓해야 되지만, 그놈의 자존심 세우겠다고 남편한테 계속 싫은 소리를 했다. 응급실은 약 종류가 없어서 최적의 약이 아니니 이비인후과도 가야 된다고 좋은 말로 이유를 말하면 되는데 그냥 또 말을 삼켰다. 그래 놓고선 또 남편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원인을 남한테 돌려 마음 편하고 싶어 하는 나를 보며 이래서 자식을 어찌 제대로 키우나 싶다.
무심한 부모에, 남편에게 원인을 돌리고 싶은 아내. 원인 돌리기를 하며 화내고 원망하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가감 없이 보이는 나.
예민한 큰 아이 때문에 참고 노력한 걸 또 일시에 허물며 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
남편이 있는데 없는 거 같아서 힘들다는 마음에 매몰되고 그 생각만 계속하다 보니 부작용이 너무 많다.
남편이 있건 없건 그냥 현재의 내 삶을 살아야 되는데 바라는 게 너무 많다. 힘들다는 생각을 끊어야 되고 나만 고생한다는 생각을 끊어야 된다. 남편에게 유독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끊어야 된다.
세상엔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그냥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사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