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교시 클레이로 가을 열매 바구니 만들기를 했다. 어제 가을 열매에 대해서 배우고 겉과 속 그리기까지 했건만, 정말 열심히 가르쳤건만, 대체 어제의 아이들은 어디로 가고 교실엔 새로운 아이들이 앉아 있는 것인가?
"선생님 사과가 가을 열매예요?"
"선생님 토마토가 가을 열매예요?"
"선생님 호박, 고구마도 가을에 캐나요?"
아. 절망.
제철 과일이나 열매 개념이 사라진 시대이긴 하지만 교과서에는 여름 열매, 가을 열매 이야기가 나오고 가을 열매에 대해서 배우고 장바구니 만들기, 가을 열매 종이접기, 가을 열매 관찰하고 겉과 속 그리기까지 했건만 아이들의 휘발된 기억은 위와 같은 질문들을 쏟아낸다.
이럴 땐 절망과 동시에 솔직히 짜증도 밀려온다.
'야들아, 대체 이때까지 뭘 배우고 뭘 만든 것이니? 그거 모른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잘 듣기 태도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이런 질문들을 쏟아낸단 말이냐?'
혼자 속으로 되뇔 뿐 뭔 말을 할 수 있을까. 몰라서 하는 질문들인데.
그것보다 이선생을 더 화나게 한 건 아이들의 낭비하는 습관이었다. 개별 클레이를 넉넉하게 준비 안 해서 통클레이에서 필요한 양만큼 가져가도록 시켰다.
아이들은 욕심을 내서 많이 가져간다. 그리고 남는 건 뭉쳐서 공을 만들고 던지고 논다.
분명히 재료를 나누기 전 이선생은 강조했다.
"얘들아. 클레이 낭비하지 마라.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가라. 매번 클레이 뭉쳐서 버리는 게 너무 많다. 필요한 만큼만 쓸 줄 알고 아낄 줄 알아야 된다."
가난한 시절을 살아오고 몽당연필을 볼펜대에 끼워 쓰고 자랐던 이선생의 가슴에 작은 분노가 인다.
"클레이를 이렇게 낭비하다니, 앞으로 세계 음식 만들기랑 에그셰이커도 만들어야 되는데 이제 너희들 그거 못한다."
왜 이렇게 아낄 줄 모르는 것인가? 학습 준비물을 학교에서 주고 난 뒤부터 아이들은 물건 아낄 줄을 모른다. 색연필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연필은 모았다가 날 잡아 주인을 찾아주려고 실물화상기에 비쳐줘도 주인이 안 나온다. 바깥에서 뛰어 들어온 연필도 아닐 것인데. 그동안 모은 연필로 연필 장사를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물건 챙기기도 안된다. 부모한테 연락해서 풀이나 가위를 챙겨달라고 해야 되는 단골 아이들이 있다. 매번 이선생한테 빌리러 온다.
어느 순간 4,5개 되던 내 가위는 사라졌고 내 소유로 남은 풀이라곤 없다.
오늘 선언했다.
"선생님 풀 없고 가위 없어요. 없으면 친구 것 빌려 쓰고 자기 것 꼭 준비해요."
어린 시절 준비물 하나 못 챙겨가면 선생님께 얼마나 많이 혼나던 우리 세대인가? 그러면서 자기 신변을 챙길 줄 아는 습관도 생겼는데, 요즘 아이들은 없으면 그저 선생님한테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한숨. 교실에서 교육이 사라진 느낌이다. 내가 꼰대라서 그런가? 꼰대일지도.
풍족한 세상을 살면서 궁상떨고 아끼던 시대를 생각하며 교육을 하려고 하고 있으니.
퇴직해야 될 모양이다.
클레이로 만든 가을 열매 바구니
아이들을 보내고 진이 빠진 이선생은 힘이 안 난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앉아 있다가 갑자기 브런치에서 많이 보았던 AI프로필이 생각이 났다. 스트레스 한가득인데 설치하고 사진 한 번 만들어볼까?
1시간 안에 사진을 만들려면 2200원을 주면 된단다. 이런 것에 돈 쓰는 거 지질이도 싫어하는데 손가락이 냅다 빠른 속도로 구매를 누른다. 사진 20장을 업로드했다. 에지간히 스트레스 쌓였나 보다.
알람을 알려줄 테니 할 일을 하라고 하신다.
띠링 띠링.
알람이 울렸다.
짠...
앗... 이런 사기 치는 앱이라니. 이게 어딜 봐서 나란 말인가?
자. 닮은 부분을 찾아보자. 오호 있긴 하다.
지금처럼 중력의 힘에 의해 얼굴선이 무너지기 전에 살이 찌기 전에 얼굴형은 저랬었다. 얼굴형을 부러워하던 후배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작은 눈. 무표정한 입매. 풍성한 머리숱 정도. 아 코끝도 닮았다. 수술했냐고 의심받던 코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사기다. 요즘 애들 말로 개사기다. 절대 나는 아니다.
아 사진 속 그대로라면 이십 대 때 교대를 가지 말고 미스코리아 대회를 나갔어야 된다. 그랬으면 30명 꼬물이들과의 작은 전쟁에서는 해방되었을 터인데. 우리 남편도 만나지 않았을 것인데.(남편 미안)
사기성이 농후한 내 사진 앞에서, 아침에 본 부은 얼굴과 흰머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렇게 예쁘지 않아도 되니 흰머리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도다.
아니면 시간을 훅 건너뛰어 퇴직한 뒤의 나로 가버리고 싶다.
평화로 가벼운 발걸음을 떼었다가 분노의 정상에 오른 뒤 사기 사진과 함께 내리막을 내려온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