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이 해왔던 말인가?
"삼부자 같이 여행 좀 가라, 제발. 나를 조금만 쉬게 해 다오. 아들하고 사이도 안 좋은데 여행 통해서 관계를 좀 맺어봐라. 그게 내가 사는 길이다. 엄마한테 툴툴거리고 예의도 없으면서도 엄마한테만 기대는 아들이 아빠한테도 좀 기댈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지 않겠어? 나 혼자 엄마 노릇에 아빠 노릇까지 다하란 건 너무하잖아. 여행을 가도 내 옆에만 붙어서 내 손만 잡고 늘어지던 아이들 아니니? 당신은 조선시대 양반처럼 뒷짐 지고 5미터 앞서서 걸어가 버리고 애들은 늘 내 옆에서 찡얼거리지 않았어? 내가 이렇게 당신 등 밀어줄 아들을 둘이나 낳아줬건만 어떻게 그렇게 아들하고 관계를 안 맺어? 교육 관련 서적을 수도 없이 읽어봐도 아빠하고 관계가 잘되는 집 애들이 잘 크고 안정되게 큰다고 말혀. 생각해 봐. 잔소리만 해대고 자잘한 거 꼬투리 잡는 엄마하고만 관계하는 자식이 얼마나 더 잘 크겠냐고요? 자잘한 아이밖에 더 되겠어? 물론 한석봉 어머니 같으신 분은 남편 없이도 아를 잘 키우겠지만, 알잖아? 당신 마누라 공부만 좀 잘했지. 정서적으로 크게 안정되지도 못했고 사랑이란 걸 크게 모르고 자라서 애들 키우는데 한계가 있단 걸. 썩 현모양처는 아니란 걸."
한 번 잔소리 시작하면 끝이 안 보인다. 써 놓고 보니 좀 심하긴 하다. 이걸 무던하게 들어주는 남편한테도 고맙긴 하지만, 여행 가면 늘 양반처럼 뒷짐 지고 5미터 이상 앞서가는 조선 시대 남자 같았으니 잔소리 들어도 마땅하다.
아들이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던 1학년 때부터 남편에게 아들과의 여행을 제안했다. 그 뒤 장시간 아빠는 내 제안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상 시간도 없긴 했다. 대기업에 근무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12시 1시였다. 토, 일도 피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남편이 문재인정부가 들어서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이젠 저녁에 골프연습장을 간다. 결국 아들과의 부자 여행은 미루고 미루어졌다.
그동안 한 해에 3,4번은 위의 잔소리를 녹음기 틀듯이 되풀이했다. 하지만 꿈쩍 않는 우리 애들 아빠.
나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
'니는 캐라.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릴 터이니. 잔소리는 잠깐 듣고 말면 되고. 당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면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 안 그래도 안 예쁜 아들 녀석.'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10년간 잔소리를 했다.
10년에 이어진 잔소리가 드디어 효과를 냈다. 삼부자 10월 27일 금요일자로 2박 3일 일본여행을 떠났다. 나의 자유를 위해서 돈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표가 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 모르겠다. 2박 3일의 꿀 같은 자유를 위해서 앞으로 1년간 옷 한 벌 안 사 입음 되지 뭐라고 편하게 생각한다.
아들은 간다 했다 안 간다 했다 시시각각 사람 속을 뒤집어 놨으나 따라나섰다. 금요일 오늘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역까지 태워다 주고 다시 눈을 조금 붙인 후 출근했다.
아침을 안 차려도 된다. 아이들이 욕실을 쓸 시간을 생각하며 피해 가며 사용하는 조심스러움도 피해도 된다.
(이상하게 안방 화장실은 넓어도 쓰기가 싫다.)
잠꾸러기 둘째를 노심초사하며 깨우지 않아도 된다.
넓은 집에 나 혼자 있는 이 자유. 아침에 혼자 소리 지를 뻔했다.
출근하는 발걸음도 가볍다. 오늘 종일 반 아이들에게도 하늘에서 갓 내려온 천사 같은 선생님이 되었다. 시간도 빨리 가는 것 같다. 금요일 오후가 이렇게 즐겁기는 십 년 만인 것 같다. 오늘 하루 담임선생님 문자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집에 와서 아무 거나 먹고 마구 어질러 놓고 그냥 소파에 앉아서 쉬어도 된다.
남편은 아들과 약간 말다툼으로 힘든 것 같았는데 그걸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나는 편안하다. 살짜기 맛 좀 봐라 하는 고소미 씹는 마음도 올라온다. 어랏 못땠다. 참말로.
"여보. 힘들지? 고마워. 고생이다. 애들하고 즐겁게 보내요~."
그냥 엉덩이 톡톡하는 심정으로 예쁘게 정성스러운 문자 몇 통만 보내면 된다.
토, 일 대청소를 해야 될 거 같다. 하지만 즐겁다.
오늘밤 불면증에 시달려도 좋고, 내일 늦게 깨도 상관없고, 때 맞춰 밥 안 차려도 된다. 늘어지게 내 멋대로 있어도 된다. 내일은 브런치 작가님들 밀린 글이나 읽고 책이나 읽고 한 껏 게으름 피우고 싶다.
알고 있었지만 오늘 한 번 더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정말 불량주부였다는 걸. 야호!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