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 40시간 만에 집밖으로 나서다

by 나무 향기

40시간 만에 집 밖을 나셨다. 차량 주유를 위해서다. 2일 전부터 급유 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는데 버티고 버티고 있었다. 내일 출근길에 주유를 하러 가면 복잡할 것이니 미리 주유를 하는 게 좋다. 주유소를 향해 가는 길목에 정지 신호를 받고 바라보는 도로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신호등 뒤로 쭉 양갈래길로 쭉 뻗어 있는 단풍나무 길이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다. 폰을 들고 나오지 않아 사진을 못 찍어서 너무 아쉬웠다. 눈에 오랫동안 담으려고 하다 보니 지루한 정지 신호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의 가을은 공짜로 즐기는 자연의 선물이다. 4계절 중 가을이 없다면 내 나라에 대한 애정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봄의 벚꽃도 좋지만 가을의 단풍은 마음을 밝게 해 준다. 비록 주유를 위해 40시간 만에 집 밖을 나섰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덤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주유를 하니 계기판의 눈금이 6개밖에 차지 않는다. 단가 1862원. 7만 원 주유에 일곱 칸을 못 채우는구나. 가격이 올랐나? 작년에 기름값 인상으로 연일 뉴스에서 떠들 때 얼마였더라? 기억도 안 난다. 이런 나를 보면서 기름값 걱정 안 하고 맘껏 주유하는 것만 해도 내 삶에 정말 감사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거저 선물로 보여주는 단풍도, 자잘한 금액에 대한 큰 걱정 없이 돈을 쓸 수 있음에도, 남편이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 준 것에도, 혼자 있는 나의 따뜻한 집에도 감사, 또 감사한다. 아들이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주지만 불평할 일보다 내겐 감사할 일이 더 많다는 걸 놓치고 살았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스트레스 주는 아들마저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 얼마나 다행인가도 생각해 보게 된다.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주도하지 않는다. 얹혀 가는 걸 좋아한다. 누가 가자 하면 즐겁게 따라나선다. 하지만 절대 내가 누구를 데리고 먼저 가자고 제안하지는 않는다. 그 이면엔 상대방이 거절할까 하는 불안감도 조금은 있다.

처녀 적 신규교사 시절, 또래나 30대 초반의 아줌마 선생님들은 직원여행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분들에게 때로 속마음과 달리 가기 싫은 마냥 장단 맞춰주기도 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직원 여행 버스 안에서 춤을 추게 하거나 노래를 시키는 것, 회식 자리에서 술 못 따르면 바보 취급하는 문화 등은 싫었지만 순수한 여행 자체로는 직원 여행이 1퍼센트라도 좋은 쪽이었다. 친목회비를 모아서 그 경비로 가는 여행이지만 갈 때 목돈을 내지 않으니 왠지 공짜 같기도 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부모님과 살던 시절에 여행에 대한 절대적 경험의 부족으로 직장인이 되어서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간다는 자체가 그냥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경험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 방방곡곡 안 가 본 곳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성향은 요즘 유행하는 MBTI 중 어느 쪽인지 급 궁금해진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 나는, 결론적으로 철저한 집순이이다.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사러 나가지 않는다. 그냥 안 먹고 만다. 가을 단풍을 너무 좋아하지만, 산행도 좋아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못 나가고 안 나간다. 이런 내가 남편을 만났을 때 3시간 넘는 장거리를 매주 내려오는 남편을 보면서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늘 착각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속된 말로 하면 물고기를 잡기 위한 일시적인 노력이었을 뿐 남편도 그다지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얹혀 열심히 다니겠다는 내 희망은 조금 무너지긴 했지만, 내가 어딜 가자고 하면 전반적으로 잘 따라주고 계획도 세워주는 남편이긴 하다. 삼부자의 일본 여행도 2,3일 전 벼락치기로 준비하며 한숨을 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치 아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찌 되었든 훌륭한 여행 계획가로서 아들들을 책임지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방금 전화 온 남편이 저질 체력인 아들들에 대해서 한숨을 쉬며 말한다.

"내가 자발적 돈 쓰는 가이드고, 화 참아야 되고. 후"

저 한마디에 남편의 상황은 안 봐도 다 재생 가능한 비디오다. 우리 아들의 평소 행동과 말투를 알기에. 그것들을 다 감내하며 지금 3일째 여행하고 있는 남편에게 무한 감사한다. 이 마음이 다만 한 달이라도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철저한 집순이. 가족이 없는 공간에서 홀로 이틀밤을 보냈다. 외롭지도 않다. 희한하게도 일어나기 그렇게 싫어하던 주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기 싫은 아쉬움이리라. 일찍 깼지만 느지막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대충 밥 챙겨 먹고 불교대학 수업 듣고 책도 두 권 읽고 집도 중간중간 치우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 오늘도 눈이 번쩍 뜨인다. 그것도 새벽 5시부터. 누군가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일찍 깨야 된다는 부담감이 없어서인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집안일들을 너무 의무감에서 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의무감이 나를 짓누르고 집안일 자체를 엄청난 무게로 받아들이게 했다. 토요일 하루, 깨끗한 화장실이 좋아서, 깨끗한 식탁이 좋아서 치우는 건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힘들지 않았다. 내 눈에 가족이 보일 땐 정말 치사하게도 누군가 해줬으면 내 짐을 나눠줬으면 하는 마음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나만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불량 엄마 불량 주부였다. 인정.

가족이 돌아오면 가족을 위해서 집안일을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겠다. 내가 깨끗한 환경에서 있고 싶으니까, 내가 어질러진 환경이 싫으니까 나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겠다. 그런 생각에서 임한다면 조금 더러운 것도 내가 힘들어서 안 하는 것이니까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가족이 돌아올 시간을 향해 시곗바늘은 움직이고 있다. 여행을 통해서 부자 관계가 좀 좋아졌기를. 아들 마음에 0.000001이라도 뭔가 변화가 있기를. 나는 가족에게 희생한다는 생각보다 나를 위해 삶을 살아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기를.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 조금은 삶의 변화가 있기를 바라본다.


2박 3일 자유부인이 되어 보니 정신과 약을 한 십일 치 먹은 느낌이다. 엄마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가족 구성원 간의 행복을 위해서도 화합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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