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절을 생각해 보면 중, 고등학교 시절 그저 공부만 하고 살아온 재미없는 인생이다. 너무나 할 게 없어서 심심해서 방바닥을 뒹굴고 천장도 봤다, 바닥도 봤다 하다 보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할 건 없고, 지칠 대로 지치면 책도 별로 없는 빈약한 책장에서 언니들이 사 둔 누런 종이에 촌스러운 활자들이 빼곡한 문학 소설을 꺼내 읽는 것이 나의 놀이였다. 나이에 맞지도 않는 책 속 이야기들을 브런치 작가님들처럼 감명을 받거나, 깊은 사유를 하면서 읽었던 것 같진 않다. 그냥 활자를 읽으며 시간을 때우고 지겹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는 정도였다고 회상된다.
어찌 되었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심심함의 끝자락에서 어쩔 수 없이 했던 독서들이 중, 고등 시절 공부의 밑천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책이 많았더라면 아마 좀 더 나았겠지만 우리 집 형편이 넉넉지 않았으니 그나마 언니들이 둘이나 있어 그 정도의 책이라도 읽는 혜택을 누린 것에 감사해야 될 것이다.
재미를 추구하지 못해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인생에 중요한 것이 공부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다른 여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생의 참맛을 느껴볼 만큼의 여러 가지 각도의 가치관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선생이 되었으니 평생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산다. 가끔 동료교사들 중에는 공부가 뭐 중요하냐? 앞으로 미래는 공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딱히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의 발전도 결국 공부를 한 사람들의 연구와 창의성에 기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한 개인이 세상 발전에 기여하지 않더라도 내면이 충족된 풍요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내적 지식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아이는 공부로서 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형편이 안된다. 그저 사회 속에서 섞여서 사람구실을 하고 살기만 바랄 뿐이다. 하지만 둘째는 아직 어리다. 큰 아이를 보면서 부모 뜻대로 자식들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공부이니 둘째에겐 0.1프로의 기대마저도 아직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
지난 토요일 지역에 있는 일종의 특수목적고 설명회에 다녀왔다.
아이는 물론 가기 싫어했다. 토,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나가서 피시방에 돌아다니고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는 아이니 고등학교를 어떤 목적을 두고 간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
중간고사 후에 파자마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친구 중 한 명이 사정이 생겨서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파자마 파티를 환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럴 땐 가치에 맞지 않는 것도 유혹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넘어가려고 한 파자마 파티로 설명회에 같이 가자고 계속 설득했다. 다행히 아들은 같이 참여를 했다.
알고 보니 학교 설명회는 여름에도 있고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도 있고, 수시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명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 고 1인 학생들이 10기(11기였나?)라고 하니 설립한 지 오래된 고등학교는 아니다.
정장 차림의 교장선생님은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단도 없는 무대 한가운데 서서 마치 스티브잡스처럼 간단한 환영인사와 교육이념에 대해서 설명을 하셨다. 교장이라는 존재의 무게감을 주는 연단이 없다는 것이 신선하게 와닿았다.
이 고등학교에 합격하면 희생하는 삼 년이 아닌 인생의 많은 선택과 배움을 할 수 있는 삼 년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수긍이 가는 말씀이었다. 학교시설부터 온갖 프로그램이 일반 고등학교와 비교가 안된다.
재학생들의 학교 자랑과 합격을 위한 자소서 작성방법 등의 안내가 이루어졌다.
진로를 출판기획자로 정한 여학생의 한마디가 마음에 와닿았다. 본인도 진로를 찾기까지 참 힘들었는데 고등학교 과정의 여러 활동들을 통해 꿈이 결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했던 무수한 경험들을 통해서 이루어낸 자신만의 철학을 ppt에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었다.
'헤맨 만큼 자기 땅이다.'
어린 친구의 뼈 있는 말 한마디에 내 생각은 더 확고해진다. 그래 사람이 배움을 게을리하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삶의 의미도 찾기 힘들고 뚜렷한 가치관도 확립이 되지 않으며 넓은 세계에 티끌만도 못한 존재인데 이 넓은 세상의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지 못하는 인생이 되어버릴 뿐이라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소개가 끝날 때마다 내가 고등학생으로서 여기 입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일었는데 끝나고 남편과 이야기 나눠보니 본인도 그랬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학교는 중간만 돼도 인서울 한대라는 말에 혹했지만 막상 설명회를 들으니 인서울에 초점이 맞추어지진 않는다. 큰아이 고등학교 대비 다양한 경험을 통한 진취적 기량을 길러주는 것도 마음에 들고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특기적성 활동들을 통해 재능을 찾아나가게 하는 것들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삶의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어느 정도 겪어본 우리 둘의 생각일 뿐이다. 무엇이 내 인생에 좋은 방향을 제시할 것인지 세월의 무게 속에서 어느 정도 판단할 줄 알게 된 어른의 시각일 뿐이다.
아들은 지겨워서 거의 폰만 보고 있고 언제 가냐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실망감과 좌절감이 오른다. 왜 엄마의 열정을 닮지 않았을까 하는 필요 없는 생각에도 잠겨 본다. 이제 중학교 시작이니 어떻게든 남은 이 년 공부 잘 시키고 꿈 없는 아이 뭔가 하고 싶은 목표를 만들어서 보내보고 싶은 엄마의 욕망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식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엄마 80점이면 됐어하고 만족하는 아이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게 즐거운 아이다.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자라서 욕심도 별로 없는 아이다. 엄마처럼 시간 강박증에 시달리는 아이도 아니다. 학원도 학교도 느긋하니 시간 맞춰 가고 학원을 지각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다.
"00아, 여기 오도록 열심히 공부해 보자."
"엄마, 난 여기 안 맞아. 나는 여기서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아이의 말이 맞다는 걸 안다. 소개되는 영상들의 아이들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스스로 주도해서 많은 것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밴 아이들이다. 재주도 많은 아이들이다. 엄마 닮아 내성적인 아이인 데다 엄마의 욕심과 야망은 닮지 않은 아이니 합격한다 해도 견디기 힘들 수도 있겠단 생각도 하던 차였다. 하지만 인간이 두려움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면 발전도 없을 테니 욕심도 나는 학교이기도 하다.
두 갈래 길에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그 학교 학생의 말처럼 헤맨 만큼 자기 땅이 되는데 다양한 길을 밟아보지도 않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니까 어떻게든 보내고 싶다.
아니야.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다 하더라도 아이가 못 견딘다면 불행해지는 수순을 밟는 것일 수도 있어. 그저 엄마의 욕심일 뿐이지.
그런 고민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데 교장선생님도 말씀하신다. 부모가 등 떠밀어서 오면 적응을 못할 수도 있다고.
모든 부모는 가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못 가 본 길, 나이가 들어 보니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던 길을 자식이 가 주길 바란다. 내가 살아보니 알겠더라는 꼰대 같은 조언과 함께. 아이가 따라주지 못하면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하등 필요 없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아무리 강요한들 아이의 마음이 동할리는 없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혼자 생각해 본다. 어쨌든 적당히 아이에게 이야기는 계속해 보리라고. 부모라는 위치가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는 될 수 있어야 되니까. 그렇지만 아이가 정말 원하지 않으면 아이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결국 아이의 인생을 만들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이니까.
큰 아이가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작은 아이 정도만이라도 했다면 엄청나게 압력을 줬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리고 큰 아이가 순종적인 스타일이었다면 본인의 생각은 접고 엄마의 뜻을 다 따라주었을 것이다. 부모들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순종적인 아이가 부모가 제시하는 길대로 따라준다고 마음속까지 부모를 다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님을. 부모가 제시하는 길을 따를지라도 언젠가는 부모의 뜻에 반하는 날도 올 것이라고.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도 그런 순종적인 자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되뇌고 있다. 이런 나한테 다시 한번 말해준다. 부모 된 자가 자식을 대상으로 욕심을 내면 끝도 없다는 걸, 그러다가 아이는 아이의 인생이 아니라 부모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걸, 본인의 가치관이 없는 아이로 자랄 수 있다는 걸, 부모는 방향을 잡아주는 등대는 될지언정 노를 젓고 배를 운전하는 건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의 이 년 뒤 진로는 결국 아이 선택이 될 것이지만 어떻게 방향을 잡아줘야 할지 많은 고민의 시간을 거치게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