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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Nov 16. 2023

왜 이리 어리석은 나인지.

이것저것 소소하게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사실 꼭 주어진 일들만 잘 해내기도 벅찬 현실이건만.

아이들 가르치는 일, 3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지만 어떻게 하면 마음 다독이고 잘못된 행동을 따뜻한 말로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 우리 아이들 맛있는 식사 차리는 일, 집 청소하는 일만 해도 벅차고 벅찬 시간들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곁다리로 글 쓰고 책 읽고, 중단한 지 오래되었던 영어도 시작해 보고 또 마무리 짓지 못하고 흐지부지될 일들을 여기저기 벌리기 시작한다.

이러다 또 지치면 무기력에 빠질 터이다.

일을 벌이다 보니 어느 것도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그리고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못마땅한 감정들이 두더지 게임하듯 여기저기서 쑥쑥 튀어나온다. 그러면 그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온갖 생각을 한다.

-욕심내지 말자.

-한다는 게 어디야?

-하다가 실패해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생겨.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아직도 애쓰고 살면 그것만도 잘 사는 거야.

온갖 자기 계발서와 심리 관련 책들에서 읽은 것들을 끄집어 내 나를 위로해 본다.


나 혼자 사는 인생이면 이래도 큰 무리는 없다. 미성년인 아이들은 아직 내 몫이라 몸을 혹사하고 피곤하게 만들수록 아들의 한마디에 곤두서게 된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충돌했다. 수능을 앞두고 중 고등학교 모두 일찍 하교를 했다. 전화가 와서 급식이 없었다는 거짓말을 하며 밥을 시켜 달라고 한다. 어차피 시켜줄 것 그냥 그래 알았다, 다음부터는 급식 먹자 하면 될 것을 거짓말하는 아들에 대해 못마땅한 마음이, 요 며칠 아들에 대한 걱정과 노파심으로 웅크리고 숨겨져 있던 편안하지 못한 내 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여버렸다. 결국 아들이 어떻건 있는 그대로 못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또 직시한다.

결국 아들은 넘지 않아야 될 선을 넘으며 어떤 부모도 죽을 때까지 들을 일 없는 상상하기 힘든 온갖 폭언을 퍼붓는다. 결말은 나의 항복이다. 밥을 시켜 주고 아이의 말 내용을 상기시키며 되돌아보게 했다. 잘못했다고 하지만 진심인지도 알 수 없고, 내 마음에 또 한 번 꽂힌 비수는 뽑으면 피가 철철 흐를 것 같고 안 뽑으면 숨이 안 쉬어질 거 같다. 이도 저도 못하고 얻은 것도 없는 전쟁이었다.

결국 스트레스로 매운 게 당겨 짬뽕을 남편과 먹고 배만 아프고, 운동을 했지만 저울에 뜬 몸무게는 기절할 것 같고. 그냥 눈 딱 감고 아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면 될 것을 가르친다는 그럴듯한 명제 아래 잔소리를 했다가 얻은 건 하나도 없다. 엄마가 되어야 되는데 여전히 가정 내에서 선생 놀이 중인 나도 되돌아보게 된다.


오후에 즉문즉설을 듣는데 법륜스님이 말씀하신다.

자식이 부모를 보듬겠냐? 부모가 자식을 보듬겠냐는 취지의 말씀이시다.

결국 아무리 못나도 자식을 보듬어야 될 것은 부모이고 올바른 행동을 보여야 될 주체는 부모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너그럽고 어질어 내 마음을 보듬어 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라는 취지의 말씀이다. 백 번 옳다. 누가 더 살았는데 누가 누굴 품어야 되는 것인가?


"그래 밥 시켜줄게. 다음부터는 먹고 오고 거짓말하지 말자. 엄마한테 거짓말을 할 정도로 솔직해야 되는 상황이 두렵다면, 엄마가 너그럽지 못했다면 그것도 엄마 잘못이었던 거 같네."

이 말 한마디가 뭐 그리 힘들어서 서로 생채기를 내고 결국 내가 지는 게임을 시작하는 건지.

그리고 아들의 지나간 행위들을 자꾸 내 마음 속에 묻어뒀다가 꺼내는 건지. 싹 지울 순 없겠지만 흐릿하게라도 만들어야 되건만.


결국 해줘야 될 일, 해 주는 것으로 끝날 일 앞에서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남편의 말을 자꾸 되새겨야 될 일이다. 
왜 이리 어리석은 나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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