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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Nov 30. 2023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이제 내일이면 2023년도 달력 한 장으로 마무리가 시작되는 날이다.

달력이 한 장 남으면 학교는 화장실 갈 겨를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마무리 짓기 위한 수없는 평가 작업과 기록의 시간들, 밀린 진도와의 전쟁(저학년은 큰 무리가 없으나 고학년은 숨 쉴 틀 없이 수업해야 된다.) 내신서 작성, 학년 희망서 제출, 학교 학급 교육과정 평가서 제출, 연수 마무리, 쓰지 않은 예산 집행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을 달력 한 장과 함께 마무리지어야 된다. 초등의 경우는 교실도 비워줘야 돼서 이삿짐을 싸야 돼서 마음이 심란해지는 달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될 순간이 다가오는데, 1년 동안 익숙해진 아이들은 선생님이 편안하다. 선생님들은 할 일에 치여서 아이들에게 소홀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자칫 방심하면 달력 한 장을 남겨놓고 뜻하지 않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무사히 달력 한 장을 떼는 순간이 와야 한 해 농사를 편안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다. 달력 한 장을 가벼운 마음으로 뗄 수 있기를 바란다.


달력 한 장을 넘기면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아들에게 주는 의미는 크지 않다.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춰버린 듯한 아들은 초 2나 중 2나 고 2나 꿈도 없고 적응도 힘들고 희망도 없다. 말주변도 초 2나 똑같고 생각하는 수준도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초 2 때가 더 명랑하고 희망적이고 꿈이 있었다면 있었던 것 같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버렸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아들은 요 며칠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다. 엄마는 그저 아들이 어떻게 독립을 하나, 공부를 해야 되지 않나,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되지 않나 걱정인데 예상치 않은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자퇴까지 운운하고 있다.


누구보다 괴로운 것은 아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의 상태를 속속들이 100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학창 시절 나의 고민 범주에 들지 않았던 일로 마음을 다치고 있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겪은 범위 내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기 마련이라 학창 시절 고민 범주에 들지 않았던 일, 내가 생각하기엔 하찮은 일로 고민하는 아들을 100퍼센트 이해하기가 힘들다. 내 기준에선 학창 시절 해야 될 일은 공부가 우선이고, 진로가 우선이고, 책임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다 다 다르고 개별성을 존중해 줘야 된다고 가르치는 선생인데, 그런 엄마라면 어떤 일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될 것이다. 언행일치가 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언제쯤이면 정말 엄마다운 엄마가 될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오랜만에 상담선생님을 만났다. 엄마에게 다 말할 수 없으니 상담선생님께 털어놓으라고 했다. 말주변이 좋은 아이도 아니고 속을 확 털어놓는 아이도 아니니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긴 상담 후 선생님은 우리 아들에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난 또 그 긴 시간 앞에서 조급증이 앞서고 답답함이 앞서고 이기심이 든다. 덩치는 크고 나이는 들어가는 아이를 내가 언제까지 책임져야 되나 하는 이기적인 마음.


저녁을 먹고 잠들어 버린 아들에게 이를 닦으라고 이야기를 하러 갔다가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눈물이 난다. 분명 귀엽고 이쁜 아이였는데 덩치만 컸지 아기 같은 아들인데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나의 너그럽지 못함과 철학의 부재와 욕심이 이렇게 만든 것이란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00야,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람들을 자꾸 원망하고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너를 위해서 편안한 마음을 내었으면 좋겠어."

잠결에 듣던 아이가 응 응 대답을 한다.


아이가 편안했으면 좋겠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미움을 걷어냈으면 좋겠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으면 좋겠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떼면 우리 반 아이들과의 시간을 고이 접어 한편에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지만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면 지나간 날들을 크게 꺼내 보진 않게 된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지만, 교사 경력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지나간 한 해를 끄집어내서 복기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서 상처가 될 때도 있었고, 이상하게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내 마음과 다를 아이들 생각에 혼자 마음 상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지나간 시간은 그냥 흘려보낸다. 아이들 이름도 잊어버리려고 한다. 나이가 드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하지만 때론 잊는 것도 인생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들과의 지난 시간은 한 곳에 두고 끄집어내지 않고 싶다. 내가 모자란 부분이 많아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아들이 나에게 준 상처들도 많아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면도 있다. 

고등학교 입학하면 좀 달라질까 희망을 품었지만 11장의 달력을 떼고 한 장만 남겨 놓은 시점에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달력 11장을 하루 만에 떼 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엄마인 나는 나이만 먹고 아들은 또 키가 또 한 뼘 크겠지만 마음의 성장은 멈춰버린 것 같다.



엄마 생신이라서 전화를 드렸다. 엄마는 말씀하신다.

"네가 00이 때문에 힘든 거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위로 앞에 괜찮다고도 힘들다고도 말하기 힘든 상황이 힘이 든다.

80 넘은 엄마에게 걱정을 끼쳐야 되는 딸이 되어서 속이 상한다. 아들의 상처 입은 마음과 고장 난 마음을 설거지하듯이 깨끗하게 해 줄 수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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