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잘 키우는 엄마 역할과 일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죄는 아니다.)
워라밸이란 용어가 몇 년 전부터 유행이다. 워라밸이란 말이 나오기 전부터 줄곧 일과 삶의 조화와 균형을 부르짖고 살았다.(부르짖기만 했지 내 삶은 워라밸과 진짜 거리가 멀고, 영원히 올라올 것 같지 않은 기울어진 시소 한 쪽 끝에 서 있는 위태 위태한 느낌이다. )
어쨌든 워라밸이란 용어가 유행하기 이전부터 3월에 만드는 학급 일지의 제목은 항상 '내 일과 삶의 조화와 균형'이었다.
학급은 일종의 소왕국이다. 써 놓고 보니 왕국이란 말이 좀 거슬리지만 그만큼 교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학급 면면 양상은 다 바뀌어 버리고 교사가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들여다 보거나 간섭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쓴 표현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엄마로서의 삶보다 선생으로서의 삶을 우선시 여기고 살아왔다.
이건 개인적 성향에 기인할 수도 있고, 거창하게 말하면 나는 대한민국 선생이니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사명감에서 기인한 말도 안되는 욕심일 수도 있다.
내가 사명감이라고 생각했던 욕심 때문에, 내 아이의 삶을 바르게 온전하게 살펴보지 못했고 아이와의 갈등이 내 일에도 몇 년 동안 영향을 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금은 마음을 내리고 내 아이의 삶도 살필 줄 아는 게 결국 우리반 학생들을 더욱 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난 왜 모르고 살았던 걸까?
후회와 반성.
그래도 하나 희망은 인간의 삶은 끊임 없이 뒤를 돌아보며 새로운 방법을 찾고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일과 엄마 역할의 조화와 균형' - 일종의 '워마밸'을 꿈꾸며 직장에서도 집에서 역할을 분리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꿈꿔 본다.
< 아들과의 하루>
아이랑 같은 학교에 다닐 때였다. 늘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에 갈증을 느끼는 아들이 하교하고 교실에 오면 학원으로 쫓아보내기 바빴다. 엄마는 일하는 시간에 일을 해야 된다. 월급을 받았으니 그만큼 최선을 다해야 된다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 때 다만 십분이라도 아이랑 놀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큰일 나는 것이었을까? 내가 그렇게 낭비한 십분, 이십분은 또 다른 공간에서 학급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시간으로 채우면 될 것을 말이다.
내 아이도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것이고, 사회의 짐이 되지 않고 보탬이 되게 하려면 우리반 아이들 만큼 정성을 기울여야 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