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향후 전망
대만과 한국은 일견 많이 닮아 있는 나라다. 분단의 아픔을 겪었고, 같은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이며, 일찌감치 제조업, 특히 첨단 산업에서의 경쟁력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여 제조 입국을 이룬 나라들이다. 국토 면적과 인구는 각각 대만이 한국의 대략 40% 정도 되는데, 두 나라 모두 지하 자원이나 국제 정치 관점에서의 지리적 여건이 딱히 유리하지는 않기 때문에 인적 자원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경제적으로 두 나라는 비슷한 수준이다. 체급 자체는 한국이 높지만 (명목 GDP 기준, 한국 vs 대만 = 1.8 vs 0.7조 달러, PPP 기준 2.5 vs 1.4조 달러 ), 1인당 기준으로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대만이 앞서 있기도 하다 (명목 GDP 기준, 한국 vs 대만 = 35k vs 32k, PPP 기준 48k vs 59k).
특히 반도체 산업 관련, 두 나라가 전세계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점유하는 비중은 70%를 상회하며, 특히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대만이 60% 이상, 한국은 15% 정도를 차지하면서 전세계 75% 이상을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동아시아가 제 2의 페르시아만으로 불리게 될 정도의 쏠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반도체 산업 중심의 대만 GDP 성장 엔진의 강력함이 경이로울 정도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최근의 뉴스를 통해 삼성의 경쟁사로 자주 언급되는 T사에 대해서만 익숙할텐데, 사실 대만의 IT 클러스터는 반도체를 위시로, 컴퓨터, 전자 산업, 부품과 장비 산업까지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정도로 굉장히 세밀하게, 그러나 철저하게 최적화되어 있다. 그 배경에는 일찌감치 클러스터 형성에 대해 장기적으로 정책적 지원과 경제 계획을 입안한 대만 정부의 리더쉽이 있을 것이다.
첨부한 그림 1을 보면 한국이 일본의 1인당 GDP를 몇 년 안으로 추월할 것이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부분은 대만이 오히려 한국의 1인당 GDP를 3-4년만에 추월할 것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 적었지만 PPP 기준으로는 이미 대만은 한국은 물론 일본도 추월한지 오래다. 그런데 명목상 GDP에서마저 대만이 한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대만의 경제 성장률이 한국을 상회할 것임을 의미한다. 대만 역시 고립된 나라라 그런지 언론이 과도하게 다른 나라를 신경쓰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나 일본과 한국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일본은 다소 호의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은 좋게 봐도 선의의 경쟁 상대 혹은 이겨야 할 대상이고, 나쁘게 보면 여전히 자신을 배신한 나라로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대만 언론 입장에서는 한국을 명목상 1인당 GDP로 추월한다는 전망은 충분히 기분이 좋아지는 전망일 것이다.
그렇지만 대만의 경제 성장률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조금 더 들여다 보면 대만 언론이 마냥 호재를 외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만의 경제 성장률은 주로 대만의 제조업, 특히 반도체 산업을 위시로 하는 IT 및 첨단 산업에서 나온다.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대만 전체가 하나의 공장으로 작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훌륭한 클러스터를 이뤄 왔고, 그를 통해 기술력과 제조업의 캐파가 동시에 성장하는 역사를 만들어 왔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만 기업들이 중국으로 많이 진출하면서 중국 현지의 생산 기지를 통해 급성장하는 중국의 반도체 시장에 더 먼저 안착할 수 있었고, 중국 역시 대만과의 거래를 통해 자국 반도체 산업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수많은 대만의 반도체 산업 인력들이 중국 회사로 이직/전직하였고, 이는 TSMC가 매년 골머리를 썩히는 문제가 되었을 정도로 점점 심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대만의 수많은 반도체 중소기업들이 주로 중국의 동해안 지역의 주요 클러스터에 합류하면서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보조금 혜택을 보는 동시에, 중국 업체들은 대만과 합자회사를 세우며 기술 격차를 메울 수 있었다. 그야말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대 중국 수출이 급증하였고, 이는 대만 입장에서는 큰 이익으로 돌아 왔다. 미-중 갈등이 격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도 대만의 대 중국 수출 비중은 40%를 상회하며, 무역 흑자의 비중은 이보다 더 높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대만의 경제 성장률은 중국에 담보를 잡히게 되었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는 대만에게 있어서는 장기적으로는 리스크 요인이 된다. 양안 간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비교적 평안한 상태라면 이러한 요인은 대수롭지 않을 수 있겠으나, 양안 간 긴장이 점점 높아지면 한 쪽으로 과하게 쏠린 대외경제적 의존도는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실 평안한 관계라고 해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해 과도한 수출 비중을 가지고 가게 될 경우, 수입하던 측이 국산화를 많이 진행하게 되면 그것은 수출하던 측에는 성장 잠재력을 깎아 먹는 요인이 된다.
이런 이유로 혹시라도 한국에서 이러한 리포트를 참고하여 대만을 본받아 한국도 한 나라에 대한 수출 비중을 거의 절반에 육박시키면서까지 GDP를 올려야 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전략은 하책이 된다. 한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1/3을 넘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면 그것은 그 나라가 상대국에 대해 사실상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반도체가 견인하는 GDP 성장은 한국은 물론이고 대만에서도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사실 이 부분이 대만 입장에서는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가 될 것이다. 반도체發 성장 잠재력이 계속 중국과의 교역에서 창출된다면, 언제든지 중국이 이를 무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역 자체를 끊음으로서 이러한 위기가 생긴다기 보다는, 조금씩 중국이 자체 국산화 비율을 높여가면서 (중국이 반도체굴기를 10년 넘게 외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 대만 의존도를 낮추는 맥락에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생김으로써 그러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의 대중 견제가 조금 느슨해지면 다시 대만 업체들의 중국 진출은 활발해질 것이고, 더 많은 대만 출신 인력들이 중국 회사에서 일하게 될 것인데, 이는 사실 대만보다는 중국 GDP 증가에 더 보탬이 될 것이다.
미-중 간의 반도체 갈등 구조 속에 대만이나 한국이 얻어야 할 교훈은 나라든 기업이든 오로지 수익만을 앞세워 어느 한 쪽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갖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기적인 수익 창출 측면에서는 윈-윈하는 달콤한 관계로 보이겠지만, 사실 기회가 있을 때 제 때 커플링 의존도를 제어하지 못 하면 무게중심은 기술을 가진 쪽보다 시장을 만드는 쪽에 더 쏠리게 된다. 그리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술적 우위마저도 점점 희미해지면 이제는 수익 창출의 일방적 구조도 역전된다. 제조입국으로서 수출을 통해 가치를 끌어 오는 강소국들은 이러한 생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대만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의 잠재적 위험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지만, 중국과의 관계는 워낙 특수한 관계이고, 중국에 진출한 수많은 대만 업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중국으로부터 창출되는 거대한 국부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대체할 것인지 고민이 클 것이다. 대만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독립적인 민주국가 (혹은 준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만 입장에서는 앞으로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어떤 방식으로 제어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한국이나 일본을 추월했다는 것은 대만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한 의제가 아니고 그것이 목표일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과의 협력 구도를 더 단단하게 가져 가는 것이 그들의 장기적 전략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