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력서를 작성하던 시기는 석사 마치고 취업할 회사를 찾던 때였다. 당시 석사학위 지도교수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리며 이력서를 참고 자료로 같이 보내 드렸는데, 이력서에 적힌 'XX회사 인턴' 경력은 뭐냐고 지도 교수님이 물어보셔서, 학부 3학년 때 2주 간 다녀온 XX회사 현장 실습 (학점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에 대한 증빙 자료를 구비해 두었냐고 말씀하셔서, '아마 회사에 전화하면 만들어주지 않을까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지도교수님은 일단 2주짜리 현장 실습을 경력으로 써내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말씀해 주셨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1) 일반적으로 경력란에는 특정 기간 동안 일한 경력을 쓸 텐데, 그 경력이 여러 개가 되면 기본적으로 그러한 경력들은 서로 비슷한 층위를 가짐을 가정하게 된다.
2) 그런데 그중 2주짜리 현장 실습 같은 자잘한 경험이 병치되어 있으면 다른 경력들의 중요함이 희석될 수 있다.
3) 더구나 2주짜리 현장 실습은 이미 학점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중복 인정 소지가 있다.
4) 2주짜리 현장 실습에 대해 공식 문서로 그것을 확인해주는 회사는 거의 없으므로, 증빙 자료가 부실할 시, 그것은 나중에 허위 경력이 될 수 있다.
등을 이야기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이력서에는 논문에 대한 내용도 적었는데, 당시 퍼블리쉬된 2편의 공저자 페이퍼와 준비 중인 2편의 주저자 페이퍼를 같이 기재했다. 선생님께서는 준비 중인 페이퍼는 빼라고 하셨다. 준비 중인 페이퍼까지 같이 쓰는 경우는 대부분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을 것이고 괜히 오해만 불러일으킨다고 하셨다. 특정 저널에 이미 서브밋한 페이퍼라면 경우에 따라 기재할 수도 있지만 in preparation paper는 가급적 넣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학력에 대해서도 교환학생 경력을 굳이 넣어야 한다면, 역시 학점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넣으라고 하셨다. 나 같은 경우는 교환학생 경험이 없었지만,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리려 찾아온 다른 학우의 케이스를 언급하시면서 그 학생은 휴학 중에 잠깐 다녀온 어학연수를 교환학생 경력으로 기재한 것이 보여서 좀 혼내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교환학생과 어학연수 용 F1 비자 등록은 전혀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석사 때 지도교수님은 추천서도 아주 정확하고 담백하게 써 주셨는데, 제자들이 추천서를 대신 써 가는 관행도 전혀 인정하지 않으셨을뿐더러, 당신께서 쓰신 추천서를 제자들에게 잘 보여 주시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실 대부분 추천서를 보지 않겠다는 waiver 항목에 체크를 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 당신께서 알고 있는 제자의 팩트에 대해 짧고 명료하게 쓰셨으며, 본인의 신용을 담보로 쓰신다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KIST 재직 시절, 내게 해외 대학원 진학 용 추천서를 부탁한 학연 생이 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탑스쿨에 지원하려고 하는지, 좀 잔뜩 부풀려진 CV를 들고 왔다. 준비 중인 페이퍼 리스트를 주욱 나열한 부분, 온갖 extracurricular activity를 나열한 부분, 본인이 해 보지도 않은 부분을 기재한 research experience 부분 등이 보였다. 나는 그 학생을 불러서 CV의 한 줄 한 줄을 같이 확인했고, 4 페이지가 넘던 CV는 한 페이지 반으로 줄어들었다. 학생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석사 때 지도교수님께 배운 그대로, 이력은 정직해야 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경력으로 도배된 10페이지짜리 이력서보다는 팩트가 정확하고 증명할 수 있고 지원하려고 하는 분야에 의미 있는 경력이 잘 나열된 CV가 훨씬 더 임팩트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학생은 본인이 잘 찍어보지도 않은 TEM을 본인의 연구 특기 항목으로 써냈는데, 학생 보고 자네가 직접 오퍼레이트 해서 찍은 것인지 물어봤고, 학생은 오퍼레이터가 이미징해 줬고, 본인은 샘플 프렙만 했음을 고백했다. 당연히 그 내용도 CV에서 제외하라고 했다. 또한 준비 중인 페이퍼를 굳이 강조하고 싶다면, 그것은 공식 이력서보다는 사전 컨택하려고 하는 교수들에게 따로 알려주는 것이 낫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그 교수들이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경우, 간단한 내용을 정리한 ppt 정도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도 코치해 줬던 기억이 난다.
사실 경력이라는 것, 이력이라는 것, 누구나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한 줄이라도 더 기재하고픈 욕심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내세울 것이 없는 지원자라면 더더욱 하나하나의 활동 기록이 채용자 측에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력을 적을 때 적더라도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증명할 수 있고 그 의미에 대해 충분히 소명할 수 있는 경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없던 이력을 지어내며 조작하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자그마한 활동을 침소봉대하여 중대한 이력으로 포장하는 것 역시 비슷한 정도로 큰 잘못이다. 잘못된 이력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까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사실 고등학교, 적어도 학부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필히 가르쳐야 할 사회인으로서의 소양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이력서 쓰는 방법이다. 써야 할 것과 쓰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서 알려 줘야 하고, 이력서에 쓴 내용은 오로지 성인인 본인 책임이라는 것도 인지시켜야 한다. 사실 정상적인 이력서라면 그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기관의 연락처를 같이 기재하면 더 좋을 텐데, CV는 그렇게 쓴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이력서에서는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추가하는 것이 좋다. 그만큼 체크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력서에 대해 채용하려는 측이 지원자에게 그 이력 하나하나를 직접 면접 과정에서나 사전 체크 과정에서 확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그 이력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제삼자나 추천인, 지인들, 관계자들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하는 경우도 꽤 많다. 내 후배 하나는 미국에서 학위 후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어떤 기관에 지원했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으나, 그 기관이 내게 레퍼런스 체크 전화를 걸어와서 한 20분 간 통화했던 기억이 있다. 채용 측에서는 굉장히 상세한 질문을 했고, 특히 그 후배가 했다고 기록한 프로젝트와 썼다는 공동 1 저자 논문에서의 실제 연구 공헌도, 그리고 그 의미를 묻는 질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주의 깊게 핵심 질문만 골라서 했으며, 채용하는 측이 후보자의 어떤 부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지를 엿보면서 후배가 자기소개서 혹은 이력서에서 어떤 내용을 강조했는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 후배는 그 기관에 잘 취직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레퍼런스 체크 과정에서 후배가 기술한 내용과 제삼자가 검증한 내용이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사실 한국 사회는 90년대 이전만 해도 인맥,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경력 체크, 자격요건 체크 없이 직장을 구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일단의 장점도 있었겠지만, 사실 충분히 퀄리파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이른바 좋은 직장이나 직위를 얻게 된 경우도 허다했다. 사회의 시스템이 조금씩 갖춰지고, 신뢰라는 것이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중요도가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러한 부끄러운 관행은 꽤 많이 사라졌다. 여전히 예전 관행의 흔적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지만, 이제는 공적 영역에서든 사적 영역에서든 채용 시스템은 거의 확립되었고, 이런 관행을 통한, '부적격자' 채용은 지원하는 측이나 채용하는 측에 큰 부담을 안기기에 웬만해서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만큼 신뢰라는 자산의 중요도가 자리 잡힌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신뢰의 출발선은 스스로 작성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로부터 시작한다. 이력서 상의 경력을 조작하기도 어렵거니와, 언제든 다중 레퍼런스 체크를 통해 필터링되고, 필터링된 후보는 관련 업계에서 블랙리스트가 될 확률이 높아지므로 큰 담력이 없다면 이제는 자신의 신뢰도를 걸고 조작이나 과장을 하는 것은 실익이 별로 없는 일이다.
정치인들 혹은 정치인의 친인척들의 사회생활이라고 해서 일반 시민의 그것과 구별될 필요는 없다. 똑같이 본인의 인생 경로에 대해 공인이기 이전에, 사회인으로 책임져야 한다. 특히 공인으로서 라면 그가 대표할 수 있는 시민사회 전체에 대해 norm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잘못 기술된 경력, 조작에 가까운 이력, 과장된 활동과 경험을 통해 유무형의 이득을 얻고 그것을 통해 더 높은 지위를 확보한 과정에 대해 제대로 된 검증과 반성이 없다면, 이제는 그 공인의 잘못된 norm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렇게 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혹은 그렇게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이고 바보라는 인식이라는 잘못된 norm이 될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공정에 민감하고, 학력과 경력에 민감한 나라에서는 일반적인 사회인들이 고생하며 쌓아 온 인생의 경로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norm의 비틈은 정치인의 생명을 한 번에 망가뜨리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인생은 한 번 사는데, 18세 이후의 성인으로서 쌓아 온 인생 경로는 본인만이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기술하는 것도 본인의 책임이다. 자연인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전혀 이루지 않고 산다면 상관없겠으나,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순간부터는 본인의 인생 경로는 본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정말 새삼스러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민 사회를 대표하겠다는 정치인이나 공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