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석준 Seok Joon Kwon Feb 21. 2023

로그스케일로 수렴하는 연구비, 그리고 연구 성과

투자대비 연구 성과 수월성을 달성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

친한 교수님 한 분이 미국 일리노이 어바나-샴페인 주립대 (UIUC) 방문 중에 중국의 양자컴퓨터 (더 정확히는 boson sampling을 optical interferometer network으로 구현하는 시스템) 연구자들이 겪은 일화를 공유해 주셨다. 그중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 중국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네이처인가 사이언스 지에 보낸 페이퍼에 대해 리뷰 리포트를 받았던 부분이었다. 페이퍼를 리뷰한 (아마도 리뷰어 #2) 사람이 데이터의 신빙성을 더 높이기 위해 굉장히 엄격한 실험을 추가로 요구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부분의 과학 저널에서 늘 있는 일이므로 흥미로운 부분이랄 것이 없다. 그런데 사실 흥미로운 부분은 그 엄격한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백만 달러 이상의 연구비를 더 투입하여 데이터를 뽑아내야 할 정도의 엄청난 요구였다는 것이다. 물론 일각의 음모론처럼, 미국이 중국의 양자컴퓨터 분야에서의 급속한 기술 발전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더 엄격하게 연구 데이터를 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양자컴퓨터 분야의 특징 상, 노이즈성 데이터가 시그널로 둔갑하는 현상은 언제든 생길 수 있고, 워낙에 첨예한 논쟁이 지속되는 분야라 특별한 주장, 혹은 특별한 시스템은 늘 특별한 증거를 요구하기 때문에, 미국 출신 연구자든 중국 출신 연구자든, 똑같이 엄격한 데이터 재현성과 신빙성에 대한 증빙 자료 제출은 요구받기 매한가지다.


그 이후 중국 연구자들이 정말 백만 달러 이상의 연구비를 추가로 투입하여 리뷰어가 요구한 데이터를 얻었는지, 그래서 그 데이터가 리뷰어를 만족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경우에는 저자들이 에디터에게 따로 메일을 보내어 자신들의 연구비 한계 상, 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읍소 전략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그 페이퍼가 출판되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외려 이 일화가 그저 일회성 에피소드로 회자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과거 내가 석사 과정 초년생 시절이나, 혹은 내 윗 세대들이 대학원생이던 시절만 해도 연구를 위해서 거대한 연구비가 필요한 연구 분야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른바 우주과학이나 가속기물리학, 극지탐험이나 심해탐험 같은 거대과학은 존재했으며, 수천 명의 환자들을 오랜 시간을 추적 관찰하여 하나의 논문으로 집대성하는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도 당연히 있었다. 그렇지만 그 외, 그 당시의 대부분의 과학 연구는 연구비의 규모에 절대적으로 좌지우지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에서 하는 연구 중 (예를 들어 벨랩), 연구비에 구애받지 않고 하는 연구들이 있긴 했는데, 그런 연구들은 논외로 해야 할 정도로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굳이 숫자로 이를 환원하려 한다면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모델을 만들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어떤 분야의 연구 논문이 크게 tier 1 (출판되면 교과서급 혹은 아예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하는 연구 (거의 노벨상급에 근접)), tier 2 (출판되면 학계에서 꽤 회자되고 인용도 나름 잘 되는 연구), tier 3 (출판돼도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결국 인용도 잘 안 되는 연구) 정도로 거칠게 나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정량적으로 (편의 상) 이를 따지기 위해 각 tier 사이의 영향력은 10배씩 차이 난다고 생각해 보자. 즉,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tier 1 급 논문은 tier 3급 논문에 비해 인용될 가능성이 100배 높은 셈이다. 예전에는 tier 3에서 2로, 2에서 1로 가기 위해 연구비 투입이 (편의 상) 5배씩 필요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만약 국가가 투입할 수 있는 연구비가 총 100 정도라면, 만약 tier 1급 연구에만 올인했을 경우, 영향력은 100*(100/25) = 400 이 된다. 마찬가지로 tier 2급 연구에만 올인하면, 영향력은 10*(100/5) = 200이 되고, tier 3급 연구 올인은 영향력이 1*(100/1) = 100이 된다. 


그렇지만 최근의 경향은 각 tier의 장벽을 넘어가기 위한 연구비 요구 수준이 5배가 아닌, 10배 이상이 된 느낌이 든다. 그렇자면 다시 영향력을 계산해 보자. tier 1급 올인이라면 영향력은 100*(100/100) = 100, tier 2급 올인은 10*(100/10) = 100, tier 3급 올인은 1*(100/1) = 100이 된다. 앞선 상황에 비해 어떤 tier로 가든 총영향력은 같게 나온다. 만약 어떤 국가가 경쟁 국가에 비해 총영향력을 예전에 tier 1에 올인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400 수준으로 다시 높이기 위해 연구비는 얼마나 더 증액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400으로 증액되어야 한다. 그런데 tier 2에 올인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200 수준이라면? 그렇다면 200으로만 증액하면 된다. tier 3 올인이었던 100 수준이라면? 그렇다면 그냥 증액하지 않고 계속 100으로 유지해도 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연구비 규모, 더 정확히는 국가의 경제 규모에 의한 연구 영향력 혹은 경쟁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tier 1은 tier 3에 비해 100 배 이상의 인용 가능성이 높다는 정량적 영향력 외에도, 그 자체로 교과서를 다시 쓸 정도의 영향력을 갖는 정성적 측면도 있는데, 만약 어떤 국가가 이 정도의 영향력을 점유하기 위해서는 예전보다 4배 이상의 연구비를 더 써야 한다. 그 정도 여력이 안 되는 국가는 예전보다 2배 이상의 연구비 정도로 막아야 할 것이고, 그마저도 안 되는 국가는 예전만큼의 연구비, 그 정도도 안 되는 국가는 아예 연구비를 감액하여 연구 영향력의 쇠퇴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한 세대 정도만에 그저 현재의 최상위급 연구 tier 유지를 위해 4배 이상의 연구비 증액을 감내할 수 있는 국가는 얼마나 되는가? 당연히 그 정도 비율 이상의 경제 규모가 동기간 동안 확장된 국가 정도 혹은 경제 규모와 더불어 R&D 투자 비율이 더 높아진 국가 정도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사실 한국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tier 2-3 사이의 국가에 불과했다고 봐야 한다. 전 세계 과학 저널에서 한국이 originality를 가지고 있는 페이퍼 비율은 0.1% 수준 밖에 안 되었고, Nature니 Science이 하는 저널에 나오는 페이퍼는 1년에 1편이 될까 말까였다. 그러다가 90년대 중후반부터 BK21 사업이 본격화되고 대학원이 양적으로 팽창했으며, BK21사업이 1, 2, 3, N단계를 거치며 양질전환도 병행되어 한국은 이제 경제 규모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과학연구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 규모의 확장과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의 R&D 투자 비율을 높은 속도로 증가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이 현재 한국의 10-15위권 수준의 랭킹이다 (논문 편수 기준 혹은 JCR 상위 논문 편수 기준 혹은 인용도 기준에 따라 랭킹 변동). 한국의 GDP 규모와 비슷한 수준으로 수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양적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질적으로 다시 정부 주도의 부스터를 달아 이제는 대부분의 학문 분야에서 양적, 질적 점유율을 미국과 다투고 있는 나라는 다름 아닌 중국이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 훨씬 큰 경제 규모와 더불어, 지난 20여 년 간의 미칠듯한 성장률, 그리고 정부 차원의 대학원 프로그램 확장과 각종 굴기 사업을 통해 R&D 투자를 막대한 규모로 늘리면서 연구비를 증액시켜 왔다. 그 결과물이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중국발 연구 논문의 양적 범람, 그리고 질적으로 우수한 연구 결과들의 충격적인 증가율이다. 


과학 연구에 있어 점점 tier 1으로 가는 것은 어려워지고 있다. 예전에는 연구자들의 노력만으로도 승부할만한 구석이 좀 있었다. 예를 들어 100일 동안 얻은 데이터로 부족하면 300일, 500일 동안 인내하며 얻든지, 100명짜리 데이터가 부족하면 1,000명으로 확장하든지, 샘플 개수가 500개로 부족하면 2,000개로 확장하든지 하는 양적 투입에 의한 노력형 진입 전략이 그런대로 먹혔다. 2000년대 중후반 유행했던 나노과학 관련 연구 전략이 그런 경향을 띄었는데, 예를 들어 나노미터 스케일에서 특이한 성질을 보이는 물질을 찾기 위해 이 조합 저 조합을 말 그대로 노동력 투입에 의존하여 훑어가면서 데이터를 누적하여 tier 1-2급 페이퍼를 쓰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이제는 이러한 전략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훨씬 비싼 장비가 필요하고 훨씬 고급 재료가 필요하며 훨씬 다양한 계산과학 방법론과 훨씬 더 뚜렷한 초고해상도 이미지가 필요하다. 예전 KIST에서 연구원이던 시절, 나는 대부분의 논문을 혼자 썼다. 실험도 혼자, 분석도 혼자, 수학적 모델링도 혼자, 시뮬레이션도 혼자 했다. 그래서 연구는 비교적 편하게 할 수 있었지만 페이퍼가 출판된 저널들은 특정 분야에만 집중된 저널들이었고, 요즘 기준으로는 impact factor가 그다지 높지 않은 저널들이었다. 확실히 그 시절에 출판된 많은 논문들은 지금도 인용도가 그다지 높지 않음을 본다. 박사학위를 받고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 시절에, 그리고 지금 대학으로 와서 하는 연구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대부분 공동연구고, 저자들도 그래서 대개 두 자릿수다. 공동 교신저자는 너무나 흔하고, 요구되는 전문성도 3개 이상인 경우가 흔하다. 혼자서 다 커버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노력과 장비, 소재와 기술, 소프트웨어와 국제협력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간의 압박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


예전에는 1-2억 원짜리 장비로 얻은 데이터로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출 수 있었지만, 이제는 10-20억 원짜리 장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데이터에 대한 요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50-100억 원짜리 장비를 동원해야만 얻을 수 있는 데이터를 tier 1급 저널에서 요구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TEM을 예로 들면 예전에는 7-10억 원짜리 TEM만 해도 엄청나게 고급 장비였고, 전 세계적으로도 보유한 기관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제 그 정도급의 장비는 한국에도 수십 대고, 중국에서는 수백 대며, 50억 이상의 TEM도 한국에 10대 정도, 중국에는 50대 이상이 있을 정도다. 이런 장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몇몇 데이터, 특히 무기물의 결정성에 대한 데이터는 소재과학 분야에서 tier 1급 영향력을 갖추기 위해 심심찮게 요구된다. 반도체 소자는 또 어떤가. 학교에서는 이제 회사에서 하는 수준의 소자를 만들기는 어려운데, 굳이 하고자 한다면 수백 억 원짜리 공정 장비와 수십 억 원짜리 설계 자산을 갖춘 대기업과 끈질긴 협업으로 몇 개월-몇 년을 투입해야 겨우겨우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계산과학은 다른가? 예를 들어 원자 10만 개짜리 연구는 예전에는 tier 1급 저널에도 간혹 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tier 3 가기도 만만찮다. tier 1은 수천만 개, 수억 개의 원자 움직임 추적을 요구하고, 이러한 계산은 웬만한 기관에서는 전기료 감당부터 힘들어서 접근하기 어렵다. 앞서 예로 든 양자컴퓨터 관련 연구는 어떠한가? 중국 연구자들이 수십 개의 큐빗 coherence를 얻기 위해 수십 기의 정밀한 laser interferometer network을 구축하는데 백만 달러 이상이 들었다고 하는데, 앞으로 큐빗 요구 개수가 늘어날수록 이 비용은 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바이오 분야는 예외인가? 오히려 바이오 분야는 더더욱 연구비 싸움이 치열하다. 뇌과학 연구하시는 분들에게는 몇 T짜리 fMRI를 쓰느냐에 따라 들여다볼 수 있는 영역의 해상도와 깊이와 정보의 밀도와 correlation 추정의 차원이 달라진다. 수백만 원짜리 원숭이와 수억 원짜리 원숭이에서 얻은 데이터는 아예 질적으로 전혀 다른 데이터로 취급받기도 한다. 기계학습 방법론은 다른가? 연구자들이 A100 서버에 장착한 20개 남짓한 GPU로 알고리즘 트레이닝시키고 있을 때 openAI나 구글은 수십 억, 수백 억 개의 파라미터 미세 조정이 가능한 하드웨어 구축을 위해 수천, 수만 장의 GPU 서버를 물 쓰듯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tier 2-3급 연구가 tier 1-2급 연구가 되는데 연구비 비율로 따지면 내가 연구원 시절에 혼자 쓰던 페이퍼에 들어간 연구비보다 적어도 10-20배 이상은 들어가는 것 같다. 나는 이 경향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측한다. 더 많은 전문성과 장비와 소재와 아이디어와 협력이 없으면 tier를 유지하기 어렵다.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 전문성과 장비와 소재와 아디이어와 협력을 뒷받침하려면 연구비의 전략적 집중이 필요하다.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연구는 tier 1에 집중된 것은 변함이 없고, 여전히 tier 1에 진입하는 것은 특별한 증거와 특별한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지만, 문제는 그 특별한 아이디어의 검증을 위한 증거의 확보에는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의 연구력 경쟁 구도는 어떻게 바뀔까? 결국 tier 경쟁을 감내할 수 있는 경제 규모를 가진 몇몇 국가, 그리고 높은 R&D 투입 비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민성을 가진 (혹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부나 정권을 가진) 국가 정도가 이 무시무시한 경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쟁을 개별 기관, 예를 들어 학교나 회사로 환원해 본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기관이 감당할 수 있을까? MIT나 스탠퍼드, 하버드, Caltech 같은 미국의 주요 연구기관 사립대학처럼 애초에 쌓아놓은 적립금이 수십 조원 단위이거나, 연간 동문들로부터 받는 기부금이 수백-수천 억 원에 달하는 기관이라면 개별적인 연구력 경쟁 프로그램 유지가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한국의 주요 대학은 그럴 여력이 거의 없다. 물론 앞서 언급한 미국의 대학들도 자체 재원 외에 산학 프로그램이나 정부 재원에 의존하는 비율은 높기 매한가지며 그만큼 tier 1급의 연구에서 연구비의 집중적인 투입이 차지하는 부담은 크다. 한국의 주요 대학들은 자체적인 재원 조달할 방안이 거의 없으며, 결국 대부분 정부 연구비와 산학 과제 등으로 겨우 버티는 수준 밖에는 안 된다. 그나마 대학원생이 많았던 시절, 그리고 그들의 임금이 너무도 저렴했던 시절에는 N명을 투입하여 N만큼의 연구력을 향상하는 선형 프로그램 기반의 계획이 통했지만, 이제는 앞서 언급했듯, 그런 방식으로 연구력을 올리는 시절이 아니다. 


한국은, 그리고 한국의 대학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이 무시무시한 연구비 집중에 기반한 tier 1급 영향력 싸움을 버텨낼 수 있을까? 한국의 GDP가 지금 수준의 랭킹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앞으로 한 두 세대 정도는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30년 전의 한국 GDP 랭킹과 지금 랭킹이 다르듯, 30년 후의 한국 GDP 랭킹과 지금 랭킹이 같을 가능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높아지는 방향으로 바뀐다면 다행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낮아지는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 랭킹 자체의 움직임에 대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가장 큰 driving force는 연구력, 특히 tier 1급의 연구력 유지인데, 이 연구력이 유지되지 않는 순간부터 결국 랭킹의 하락은 시작되는 셈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이 자국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러한 연구 경쟁력 하락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 한 해 걸러 받을 정도로 자주 나오는 일본의 노벨 과학상은 사실 한 세대 정도 전의 당시 일본이 자랑하던 탑 수준의 연구력 그리고 그 연구력을 뒷받침한 집중적인 연구비 덕분이었는데, 이제 그 driving force는 약해졌고, 일본도 대학원생의 만성적인 부족을 겪으며, 학계의 sustainability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년 되었다. 즉, 일본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가능성보다는 지금보다 연구력 tier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노벨상 행진도 몇 년 안에 멈추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한국은 지금 일본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연구력 tier 경쟁에 있어 결국 돈 많고 그 돈을 계속 퍼다 쓸 수 있는 나라 소수만이 혁신의 원동력을 계속 점유하게 될 것인데, 그 여력이 바닥나기 시작하는 나라들부터 조금씩 tier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고, 그 나라들에는 불행하게도 현재로서는 한국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나 같은 현장의 연구자들, 교육자들이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구조적으로 money game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한국의 힘든 경쟁은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냥 예정된 쇠퇴를 그리며 슬슬 정점에서 내려올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이 한국에 있어서는 그렇게 될 것인지 여부가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시점일 것이라 생각한다. 즉, 전략적으로 연구력 tier를 가장 높게 가장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분야와 그 연관 생태계, 그리고 산업과의 연계와 상대적인 경쟁력 추이를 철저하게 시뮬레이션하고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연구 tier에 따라 지금까지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tier가 떨어지는 분야도 같이 발전시키는 전략을 취해 온 것이 한국의 방식이었고, 이 방식은 나름 학문의 생태계를 diverse 하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점점 집중적인 연구비 확보와 유지 여부로 전체적인 국가 연구력, 나아가 혁신 동력 tier가 바뀌는 시대로 접어들면 선택과 집중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국가전략기술일 수도 있고, 12대 과제일 수도 있고, 이름은 다양하다. 주목할 점은 한국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도 10대 전략 기술, 그리고 일본, EU, 중국도 비슷한 전략을 취하고 있고, 이것을 국가의 중장기 플랜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국가별 전략 기술의 리스트를 살펴보면 대동소이하다. 6G 이상의 차세대 통신, 차세대 반도체, 양자컴, 바이오메디컬 (신약 포함), 차세대 에너지 (신재생에너지 포함), 우주개발 등등이다. 그냥 기존의 백화점식 연구 분야 육성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하겠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과거의 백화점식 공평한 1/N 방식이 아닌, 각 분야에서 sub 분야, sub의 sub 분야들이 철저하게 연결고리마다의 부가가치 창출 가능성을 바탕으로 경제성이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성을 논할 수 없는 기초과학은 아예 이러한 전략 기술의 핵심 기술로 논의되지는 않지만, 여력이 있는 국가는 기초과학을 같이 가져가고 그렇지 못 한 국가는 일부만 가져간다. 이 과정에서 각국의 한 두 세대 후의 명운이 갈릴 것으로 생각한다. 버리는 패가 정말 버릴만한 파였는지 지금은 모를 것이고, 나중에 어떤 패는 뼈아프게 후회되는 패가 될 수 있으며, 어떤 패는 두고두고 국가의 발목을 잡는 패가 될 수도 있다. 앞날은 아무도 모르고, 미래가 바뀌는 속도는 너무 빠르니 그 누구도 쉘던 박사의 심리역사학처럼 시뮬레이션할 수 없겠지만, 결국 전략적 판단의 명민함과 철저한 객관적 리플렉션, 그리고 중간중간의 냉철한 평가가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지가 국가별 명운의 방향을 가를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정부 역시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그랜드 플랜의 출범을 앞두고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고민은 쌓이고 있지만 전략적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그럴만한 리더를 찾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기업이 잘하는 것은 기업이 잘하도록 나둬야 하되, 보호할 필요가 있을 때는 보호해야 하는데 그때부터는 경제의 논리가 아닌 안보와 외교의 논리가 필요해지는 시점이고, 그래서 정부에는 더 전문성과 디테일을 갖춘 관료가 필요하다. 기초과학의 수많은 풀뿌리가 고사되는 현장 속에서 무엇을 살리고 죽일지 판단하는 것 역시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일 텐데, 그것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도 한국의 큰 숙제다. 


지난주에 다녀온 국제콘퍼런스에서 내가 새삼 깨달았던 점은 각국이 첨단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첨단 산업을 자국에 유치하고 싶어 하며, 가능한 자국의 생태계에서 그 산업을 키우고 싶어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인력과 지원이 그 산업에 편재시켜 자국의 경쟁력을 더 강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서로 겉으로는 국제 협력을 외치지만, 철저하게 모든 논리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익 위주로 흘러가며, 점잖은 표현과 우아한 문장으로 점철된 국제 회담 속에서도 이익을 둘러싼 다툼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중국을 잠재적 적국 (country of concern)으로 두는 like-minded country라고 서로들 격려하지만, 그 격려하는 손짓 속에는 늘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결국 경제 규모 좀 된다는 나라들은 앞으로 더더욱 첨단 산업의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자원을 투입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경쟁 국가의 인재와 자원라도 전략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더 혈안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과연 이러한 소리 없는 전쟁 속에 한 사람의 인재라도 더 확보하고, 한 개의 지적재산권이라도 더 오래 유지할 혜안, 그리고 프로젝트를 이어갈 준비가 되었는지 자문할 때다.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에서 교육받고 석박사 학위를 받아도 그들의 전문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폐쇄성을 가진 환경이라면 한국의 연구 경쟁력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전략적인 집단 장기 연구가 연구자들의 나눠먹기식 문화로 계속 관행적으로 이어진다면 한국의 연구 경쟁력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항우연 같은 정출연에서 고생한 연구자들에 대해 충분히 대우가 이뤄지기는 커녕, 팀의 해체가 운운되는 수준이라면 한국의 연구 경쟁력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산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들이 학교 일선에서 후학을 가르칠 기회를 아예 얻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면 한국의 연구 경쟁력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연구자가 롱텀 연구를 꿈꾸지 못하는 1년 단위의 정량 평가 시스템, 그리고 주니어급 연구자들에 대한 연공서열 문화의 강요는 한국의 연구 경쟁력을 단축시키는 요소다.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을 위해서라도 더욱 집중적인 연구비를 투입하여 더 많은 연구자, 더 강한 연구력, 더 지속가능한 연구 경쟁력을 만들어 갈 것이고, 일본은 쇠퇴해 가는 자국의 연구력을 되살리려 다시 공격적인 투자로 돌아서고 있으며, 자국 연구계의 문호를 더 넓게 외국 연구자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은 차치하고, 이러한 이웃들과라도 나란히 경쟁할 체력을 온존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과거의 문법과 문화는 과감하게 버려야 하고,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tier 1급, 아니면 아예 tier 0이 될 수 있는 분야를 발굴하여 전략적으로 키울 수 있는 혜안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공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