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석준 Seok Joon Kwon Sep 25. 2024

한국과 이란은 정말 천년 우호관계를 이어온 사이일까?

쿠시나메 이야기

Disclaimer: 이글은 역사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쓴 글은 아닙니다.

작년 윤 대통령의 UAE 방문 때 '이란은 UAE의 주적' 관련 설화가 불거져 나온 이후, 뭔가 계속 미심쩍게 마음에 남은 것이 있어서 좀 조사를 해 보았다. 윤 대통령의 설화가 있고 나서, 그 설화를 좀 세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란과 한국은 천 년의 우호 관계인데 괜히 이란을 화나게 했다'라는 식의 논조를 견지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나 역시도 서울에는 테헤란로,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있을 정도로 나름 우호적인 양국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던 점도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좀 찜찜한 느낌을 준 수사는 바로 '천 년의 우호 관계'였다.

한국이 독립해서 이란과 수교를 맺은 것이 반 세기 정도 밖에 안 될텐데 수십 년도 아니고, 수백 년도 아니고, 천 년이 웬 말인가. 너무 이상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조사해 보았더니, 그 관계는 다름아닌 이란의 조상 국가에 해당하는 페르시아와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인 통일신라와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학창 시절에 한국사를 배울 때는 신라가 페르시아까지 교역을 넓혀 직접 교류했다는 것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물론 내가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놓쳤을 수도 있지만...), 그럼 이 사실이 비교적 최근에 알려지기라도 한 것인가? 그래서 이제는 상식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이 들어 조금 더 조사를 진행해 보았다. 조사 결과 이 이야기는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라는 분이 2009년 영국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중세 이란의 고문서를 국제 연구팀과 공동으로 발굴 및 해석하여 201년-2014년에 사이에 펴낸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중세 이란의 고문서는 다름 아닌 '쿠시나메'로 불린 일종의 페르시아 영웅 서사시로서, 페르시아의 아비틴이라는 왕자가 왕조의 멸망 시기 당나라로 망명했다가, 다시 당의 정치적 압박을 피해 al silla (or al sila, 페르시아어로는 basilla)라는 나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타이후르라는 silla왕의 딸인 프라랑이라는 공주를 만나 결혼하고, 다시 페르시아로 귀국하여 페레이둔이라는 왕자를 낳아, 아비틴은 적의 손에 죽고, 그 아들인 페레이둔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원수를 갚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일종의 설화 혹은 소설로 보인다.
 

문헌을 연구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서사시는 7-8세기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며, 필사는 11세기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8세기면 신라는 삼국통일 및 나당전쟁을 끝내고 통일신라로 접어든 시절이다. 아마도 이 쿠시나메라는 서사시와 더불어 압바스 왕조의 이븐 쿠르다지바가 저술한 『도로 및 왕국 총람』 (848년 1차 간행, 885년 2차 간행)이라는 이슬람권의 문헌에 기록된 alsilla 라는 나라로 언급된 곳이 다름 아닌 통일신라였음을 이교수는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9세기에 간행된 『도로 및 왕국 총람』은 행정 문서에 가까우므로 그 객관성이나 사료로서의 가치가 꽤 높은 자료임에 반해, 쿠시나메는 말그대로 서사시라 사료로서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서사시가 완전한 창작물은 아니고 실존 인물과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쿠시나메에 언급된 인물이나 사건은 한국측 사료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는 찾아볼 수 없다. 즉, 교차검증이 안 된다. 더구나 페르시아의 왕자가 공주쯤 되는 고위 왕족과 결혼, 그리고 아예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 그곳의 나라를 되찾고 나중에 다시 사절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을 정도의 이벤트였다면 역사 사료 한 켠에라도 기록이 됭어야 마땅한 사건인데 그런 사건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쿠시나메의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물론 도로 및 왕국 총람에도 아비틴 왕자와 프라랑 공주의 러브스토리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문제는 이 쿠시나메가 대중에 소개된 이후, 너무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모르겠지만, 각종 소설이나 웹툰, 심지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고, 그 뮤지컬은 이란에서 현지 공연까지 할 정도로 꽤 센세이셜한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물론 이란 입장에서도 원래부터 한류 문화를 좋아하던 상태에서 이러한 자국의 고대가가 가미된 서사가 있는 스토리가 들어오면 더 환영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료적 신빙성에 대한 교차 검증이 안 되는 영웅 서사시 하나만 가지고 수천 년의 우호를 언급하는 것은 아무래도 여러모로 좀 이상하다.

영웅 서사시에서 다루는 결말도 아랍권의 현지 역사가 흘러간 양상과는 다르다는 것 역시 좀 이상한 부분이다. 서사시에서는 페레이둔 왕자가 조부, 부친 대에 잃었던 페르시아 왕조를 다시 세운다는 결말이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페르시아 왕조의 전신인 고대 이란 왕조는 651년에 멸망했고, 651-861년 사이에는 이슬람 제국의 통치 기간이었으며, 후대 페르시아 왕조는 821-1062년 사이에 재건되는 것으로 나온다. 즉, 아비틴 왕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하여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갔을만한 시점 (7세기말-8세기초)은 여전히 이슬람 제국 통치기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돌아가자마자 나라를 세웠을리는 없고, 그 후손들이 일종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821년에 나라를 되찾았을 수도 있다. 아예 아비틴과 프라랑이 대충 8세기 말쯤에 결혼하여 아들이 790년 정도에 태어났다면 821년은 그 아들이 장성하여 새로운 페르시아 왕조를 열게 된 주인공이 된 결과물로 보는 것도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주인공은 해외에 망명했다가 귀국한 왕자가 아닌, 아랍 제국에 밀려 동쪽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있던 페르시아 왕조의 잔당들이 규합하여 다시 왕조를 연 타히르 왕조 (태조는 타히르 이븐 후세인)이었다는 것이다. 즉, 현지에서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는 아다리가 맞지 않는다.
 

또한 서사시에서 al silla 라고 부르는 지역 역시 과연 신라가 맞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쿠시나메 외에 20여 종의 이슬람 문헌에서 silla 라는 지명 혹은 국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지역 혹은 나라가 실존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없다. 문제는 서사시에서는 al silla가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당 동쪽의 섬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의 항해술이나 지형 측량 오차를 생각하면 한반도에 있던 통일신라를 큰 섬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당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고, 당과 육로로 바로 이어졌던 시대이며, 당-신라 사이의 교역로도 충분히 잘 알려진 상태였다.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이슬람 사람들이 신라로 왔다고 해도, 서해를 건너 신라로 당도하는 도중에는 큰 섬이라고 부를만한 섬이 거의 없다 (있어 봐야 강화도나 안면도 정도다). 오히려 큰 섬 대여 섯개로 이루어진 나라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일본일 가능성도 높다. (물론 그 당시 일본은 Jipon이나 Nihon 등으로 불리고는 있었다.)
 

쿠시나메 외에, 당시 아랍 제국 혹은 페르시아 왕국과 신라가 교역한 증거로서 처용 설화도 자주 언급된다. 그렇지만 이 역시 좀 찜찜하다. 사료에 기록된 처용의 외모를 고려하여, 한 때 가장 유명한 간첩 중 한 사람이었던 중동문화사 전문가 정수일 교수가 처용의 아랍인설을 제기했는데, 나중에 쿠시나메가 공개된 이후, 처용이 바로 그 아비틴 왕자일 가능성도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이 가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사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고, 가설을 지지하는 것은 오로지 처용의 이국적인 용모 (실제로 처용탈은 한국 전통탈과는 좀 달리 이국적이다)나 사료에서의 묘사 정도가 전부다. 즉, 처용이 실제로 신라에 정착한 이슬람권 사람인지 여부부터 불분명하므로 '처용=아비틴 왕자' 설도 지금으로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내가 알기로는 기원 후 8-9세기 당은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국제화된 나라로서, 이미 로마, 아랍권 나라들과 활발한 해상 무역을 하던 나라였다. 오죽하면 남부 광주 (지금의 광저우)에 수만 명 (일각에서는 20만명까지도 추정)에 달하는 아랍-페르시아인들이 거주했을 정도였을까. 물론 그 시대에는 당나라 동해안 지역 (주로 산동 반도 지역)에 신라방도 있을 정도로, 중국의 해안 지역은 여러모로 국제화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런 지역들을 중심으로 신라방에 있던 신라인들과 광저우 지역에 있던 아랍인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접촉했을 가능성도 있고, 신라에서 가져 온 물품이 아랍의 물품과 교환되는 방식으로 중국 현지에서 중개무역 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개무역이 신라-이슬람의 직접적인 교역 가능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중국과 교역해 온 이슬람권 문화에서 역시 중국에 진출해 있던, 심지어 독자적인 정착촌까지 이루고 있던 신라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은 높고, 실제로 여러 이슬람 문헌에서 이 사실이 언급되기도 하므로, 이슬람과 신라 사이의 교역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이슬람 사람들 중에 당을 떠나 실제로 신라에 와서 아예 눌러사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쿠시나메에 나온 이야기 전부가 실제에 가까운 이야기임을 보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며, 아무 것도 증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에 정착해서 살던 아랍-페르시아인들이 당의 핍박을 피해 각지로 흩어지는 과정에서 신라로 왔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 경우 개인 차원이 아닌 집단으로 왔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내용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최근 서강대 국제지역문화원 연구원인 임평섭씨가 펴낸 '아랍-페르시아와 신라의 교류: 무슬림 집단의 신라 내 거주 가능성에 대한 문헌적 검토'라는 제하의 논문에서도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이루어졌다 (신라문화, 60, 235, 2022). 임평섭씨 역시 쿠쉬나메와 『도로 및 왕국 총람』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의 신라 내 거주 가능성을 분석했는데, 현재의 자료로는 아랍-페르시아인이 신라에 집단 거주 했을 가능성은 차치하고, 아예 직접 방문하여 교류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예 페르시아의 왕자쯤 되는 사람이 신라를 방문하여 (당연히 왕자쯤 되면 수행원도 많았을 것이다) 정착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일국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심지어 그 아이가 다시 페르시아 왕조의 부활을 이끌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멀리 나간 이야기이지 않을까 한다. 영웅 서사시에서 보이는 과장된 설화나 전설을 고려해도 실제 사료와 끼워 맞출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제한적이다. 

아비틴 왕자 이야기를 최초로 발굴하여 한국에 소개한 한양대 이희수 교수는 쿠시나메에 대한 연구 외에도, 지난 2012년에 펴낸 '이슬람과 한국문화: 걸프 해에서 경주까지 1200년 교류사'라는 교양 역사서 저술을 통해 심지어 신라인이 노아의 아들 야벳 (야페트)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아벳의 후손 일부가 박해를 피해 신라까지 피신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재의 정설과는 거리가 매우 먼, 거의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이슬람-고대 한국 교류사라는 너무 지엽적인 토픽에 매몰되어 엄밀한 학술적 분석을 생략하고 과도한 주장까지 연결되는 흔한 케이스 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 자료로 제시되는 쿠시나메의 아비틴 왕자-프라랑 공주의 러브스토리는 사실 이러한 무리수와 연계되어 신빙성이 동반적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억지로 짜내지 않더라도, 이란과 한국은 충분히 서로 우대할 수 있는 조건의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다. 지금은 비록 미국의 대 이란 제재 조치로 인해 자유로운 래왕과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으로서는 석유 자원의 대부분이 수입되는 출발점인 호르무즈 해협의 키를 쥐고 있는 중동의 맹주 이란과 척질 필요가 절대 없다. 더구나 이란은 이제 공식적으로도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로 인정 받고 있고, 언제든 북한과도 핵전력 관련하여 협력할 수 있는 나라이므로 한국의 안보 입장에서도 이란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소설 수준에 불과한 영웅 서사시를 끌고 들어와 양국 우호 관계의 오랜 역사성을 무리해서 펼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사실에 입각하여 현대 국가로서 외교 관계를 온전히 보존하고, 문화적으로 서로 교류할만한 부분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교류하면 될 것이다. 

오히려 양국 간 정상적인 외교 관계가 지속되고, 나중에 이란이 내적/외적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충분히 안정되어 국제 무대의 일원으로 다시 복귀하게 될 경우, 한국-이란의 상호 역사 교류도 활성화되어 이란의 박물관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는 이슬람 문화의 고문서를 분석하면서 페르시아-통일신라 사이에 정말 천년 이상의 우호 관계가 있었는지를 알게 될 날도 오지 않을까 한다.

작가의 이전글 [ABP: 과학적 사고 방식의 중요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