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깨는 연구가 만드는 혁신
'반도체' 하면 사람들은 흔히들 실리콘을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실리콘은 자연에서 채취하는 자원은 아니고 모래에서 출발한다. 모래의 주성분은 산화규소 (SiO2)이며, 산화규소를 환원하여 순수한 실리콘 결정을 만들고, 이를 얇게 자른 웨이퍼 위에 트랜지스터가 잔뜩 집적된 반도체 칩을 생산한다.
왜 반도체는 실리콘을 쓰게 되었을까? 실리콘은 탄소와 더불어 4족 원소, 즉, 결합을 4개 할 수 있는 원소라서 그럴까? 물론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SiO2, 즉, 앞서 언급한 산화규소를 자연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좀 이상하게 들린다. 애초에 순수한 실리콘을 얻기 위해 산화규소 덩어리인 모래를 처리했던 것 아닌가? 그렇게 힘들게 얻은 실리콘을 왜 다시 산화규소로 돌린다는 것인가? 사실 순수한 실리콘은 산소를 만나면 표면이 얇은 피막으로 덮이는데, 그것이 바로 산화규소다. 대부분의 산화물들이 그렇듯, 산화규소도 전기를 잘 통하지 않는 절연체다 (사실은 실리콘 자체가 반도체다. 1.12eV 정도의 에너지띠간격 (bandgap)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 자체도 은이나 구리 같은 금속에 비하면 전기를 잘 안 통하는 물질인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실리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4족 원소이기 때문에 불순물을 제법 잘 받아들인다. 특히 실리콘은 순수한 결정 상태에서는 체심입방격자 (body-centered cubic, BCC) 구조를 갖는데, 이 구조물의 결정 격자에는 불순물 원자들이 꽤 많이 들어갈 수 있다. 실리콘에 불순물을 주입하면 전기적 중성이 깨지며, 이온의 농도가 높아질수록 실리콘의 전기전도도를 더 높일 수 있다. 만약 불순물이 잘 주입된 실리콘 위에 산화규소 피막이 얇게 덮여 있다면 이들은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전기를 잘 통하지 않는 성질 때문에 전기적 신호의 스위칭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실리콘 산화막이 없을 경우, 전기 회로 간의 신호를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을 멀리 떨어뜨려야 하기 때문에 집적도가 낮아진다. 전기적 절연이 잘 안 될 경우, 쇼트가 나거나 신호가 섞일 수 있다. 특히 트랜지스터 구조에서는 전극 역할을 하는 소스 (Source)와 드레인 (Drain) 사이의 전류 흐름을 통제하는 게이트 (Gate) 역할을 하는 것이 산화막인데, 현재는 다른 종류의 산화막을 쓰지만, 초기에는 SiO2를 쓰는 것이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실리콘 하나만 가지고도 대부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반도체 소자를 만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실리콘이 아닌 다른 소재로도 반도체를 만들 수 있을까? 당연히 가능하다. 여전히 대세가 실리콘이라서 그렇지 실리콘 외에도 실리콘을 흉내낼 수 있는 (즉, 결정구조와 4족의 결합성을 만족할 수 있는) 소재면 일단 기능적으로는 가능하다. 이러한 종류의 반도체를 화합물반도체 (chemical compound semiconductor)라고 한다. 이들은 실리콘 반도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 (예를 들어 특수한 목적의 센서, 광반도체, LED, 촉매, 전력반도체 등)에 쓰이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무기물로 이루어진 소재였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유기물 반도체도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의 호기심에는 한이 없다. 유기물은 전기 전도성이 없다는 상식을 깨고 이미 많은 유기 단분자는 물론, 고분자 (polymer)와 올리고머 (oligomer)들이 유기 LED (OLED)나 유기 TFT (OTFT) 등에 쓰이고 있다. 특히 OLED는 현재는 첨단 디스플레이 소재로서 최선단에 있는 소재이고, 휘도, 수명, 접을 수 있는 기능성 등 모든 면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유기물 중에 고분자나 올리고머가 아닌 다른 소재도 가능할까? 앞서 말했듯 사람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에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스웨덴의 Linköping University 대학과 왕립연구소 소속 과학자들은 지난 4월 24자 미국국립과학원회보 (PNAS)에 'Electrical current modulation in wood electrochemical transistor'라는 제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218380120
이들이 착안한 유기물은 다름 아닌 나무 (balsa wood (발사목))였다. 물론 나무 그 자체는 전기를 통하지 않는다. (번개 맞은 나무가 왜 폭발하듯 둘로 갈라지나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될 것이다.) 스웨덴 과학자들이 발사 나무를 이용한 것은 실리콘을 대체하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발사 나무는 굉장히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가볍고, 수분이 잘 침투하는 나무로 유명한데, 왜냐하면 내부에 비어 있는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안에 뭔가를 집어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스웨덴 과학자들이 주목한 부분도 이것이었다. 이들은 실리콘 결정에 불순물을 주입하여 실리콘의 전기전도도를 바꾼 것처럼, 이들도 나무의 미세 조직 안에 뭔가를 집어 넣고자 했다. 이를 위해 발사목에서 채취한 조직의 리그닌 (lignin)을 먼저 유기 용매를 이용하여 제거했다. 이러면 비어 있는 공간들이 더 많아질뿐더러 채널처럼 연결된다. 리그닌이 차지하고 있던 나무의 미세 조직 빈 공간과 채널 속에 이들은 전도성 고분자 용액을 침투시켰다. 여기서 이용한 전도성 고분자 용액은 산업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PEDOT:PSS (poly(3,4-ethylenedioxythiophene)–polystyrenesulfonate) 였다. 이러한 처리를 한 나무조각을 세 개 만든 후, 그림 1에서 보듯, 이들은 게이트 역할을 하는 나무조각 (크기: 30mm*5mm*1mm, 그야말로 3nm...공정...이 아니고 3cm 공정!), 그 위에 수직으로 교차하는 채널 역할을 하는 나무조각 (크기: 30mm*2mm*1mm), 그리고 그것을 다시 수직으로 교차하여 원래 밑에 깔린 나무조각과 겹치게 만든 게이트2 나무조각 (크기: 30mm*5mm*1mm)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원시적인 트랜지스터를 만들었다. 여기서 채널 역할을 하는 두번째 나무조각의 양쪽 끝은 트랜지스터의 전극, 즉, 소스 (Source)와 드레인 (Drain) 역할을 한다. 각 나무조각들의 신호가 엉키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은 겔 전해액 (gel-electrolyte)와 발사나무 조직 혼합액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만든 트랜지스터는 게이트가 두 개인 double-gate transistor가 된다.
이렇게 만든 트랜지스터는 생각보다 튼튼하고 잘 작동되었는데, 애초에 발사목 내부 조직이 이온들의 이동에 적합할 정도의 큰 채널 구멍을 가지고 있었던데다가, 그 안을 전도성 고분자들이 빈틈없이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69 Scm^-1 이나 되는 전도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스위칭 특성 측정 결과, 이 나무 트랜지스터는 1 kHz 정도의 동작 주파수에서 50번 정도의 On/Off 가 가능한 안정적인 스위칭 특성을 보여주었으며, 작동 전후의 나무 조직도 별다른 파괴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만든 나무 트랜지스터는 현세대 가장 최선단 공정인 3나노 공정에 비해 무려 10,000,000배나 더 큰 소자 (즉, 집적도로 따진다면 10^14배나 차이난다) 이므로 첨단 반도체로 쓰일 가능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더구나 동작 스위칭 주파수 역시 현세대 트랜지스터칩보다 1,000,000배나 느리다. 즉, 우리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들어갈 일은 당분간 없다.
그러면 도대체 이러한 나무 트랜지스터는 왜 만드는 것일까?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그냥 호기심 차원의 연구 그 너머는 아니지 않을까? 연구진도 이야기했듯, 이러한 나무 트랜지스터는의 응용성이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바이오전자소자 (bio-electronics) 용으로는 꽤 적합하다. 모든 전자소자는 3나노 공정 같은 첨단고급 제조공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 나노미터를 논할 정도로 아주 작을 필요도 없다. 숲의 상태를 감시하면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소자, 생물의 몸속에서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소자가 될 수도 있다. 그 정도 기능의 소자라면 나무 트랜지스터로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그림 2에 보이듯, 마블의 영화 가디언스오브갤럭시의 인기 주인공 중 하나인 그루트 (groot)를 연상케 하는 나무 로봇 (물론 그루트는 로봇은 아니다.)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껍데기는 나무고 속은 원래대로 실리콘 반도체로 채워도 안 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all-wood-electronics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순수한' 나무 로봇을 만든다면 그 시작은 나무 트랜지스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무 트랜지스터가 앞으로 어떤 기술을 가능케 할 것인지는 아직은 불확실하다. 정말 호기심 차원의 연구에서 그냥 멈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림 3에서도 보듯, 애초 반도체 산업의 시작을 알린 1948년 AT&T Bell Lab에서 트랜지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 이들의 모습은 정말 원시적으로 보였고, 이들이 지금 같은 형태로 최첨단 기술의 총아로서 모든 전자제품의 핵심 소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는 것도 우리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무 트랜지스터가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날, 우주 방사선에도 견디고, 심해의 막대한 수압에도 견디면서 수만 년을 버틸 수 있는 나무 로봇으로 변신한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 같다. 호기심과 엉뚱함에서 시작한 연구는 이렇게 또 하나의 혁신의 씨앗이 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