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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Jan 24. 2021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의 추억

KBO의 탄생, 그리고 한일전

1월 22일 별세한 메이저리그 레전드 홈런왕 행크 아론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방한하여 친선게임 및 홈런 더비를 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사실 82년은 행크 아론 방문과 더불어, 한국 야구에 있어 굉장히 의미 깊은 해이기도 하다. 82년에 KBO가 출범했을뿐더러,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이때 열렸던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이었다. 당시 네 살이었던 나는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더운 늦여름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버지와 이웃집 어른들 몇 분이 우리 집에 모여 금성사 칼라 브라운관 TV를 켜 놓고 야구 중계를 봤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한-일 관계는 별로 좋은 감정이 없어서 다른 종목의 한일전만큼이나 이 경기는 어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라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특히 대회의 우승자를 가리는 경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보던 일본 선수진의 태도와 국민감정이 뒤섞여 그야말로 결승전에 쏠린 관심은 월드컵 한일전은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라고 어른들이 나중에 말씀해 주셨다.)


내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경기 막바지 (나중에 그것이 8회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0:2로 끌려가던 한국이 한대화 선수의 쓰리런으로 경기를 한 번에 뒤집은 장면이었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 한대화 선수의 아크로바틱 하고 역동적인 스윙폼과 멀리멀리 쭉쭉 뻗어나가 잠실구장 좌측 폴대를 훌쩍 넘어가던 야구공이 화면에 잡힌 모습이 생생하다. 당연히 경기를 보던 어른들은 큰 소리로 환호를 했고 온 아파트가 떠나가라 동네에 함성이 가득했다. 난 그 와중에 아버지가 마시다 조금 남긴 맥줏잔에 담긴 노란 액체에 호기심이 생겨 두 손으로 그 유리잔을 잡고 바로 홀짝였고, 놀란 어른들이 제지하려 했던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아마 홀짝인 후 바로 취해서 엎어져 잠에 든 것 같다. 그때부터 나의 음주 생활이 시작된... 아 이건 아니고..


가끔씩 이 장면이 생각날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맞는지 유튜브에 한대화 선수의 바로 그 쓰리런 장면을 찾아보곤 한다. (바쁜 분들은 2:20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f2TG5I0UunI&feature=emb_logo


이 경기는 워낙 8회 말 한대화 선수의 쓰리런이 강렬했기 때문에 한대화를 기억하는 팬들이 더 많지만, 사실 대회 전체의 MVP는 3승 ERA 0.31 (29이닝 1 자책)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거둔 선동렬 선수였고, 실제로 선동렬 투수의 활약은 '에이스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회 전에는 최동원 선수에 대해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쏠렸지만, 최동원 선수보다는 선동렬 선수가 대회 내내 훨씬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면서 세간의 관심은 본격적으로 최 vs 선의 라이벌 구도로 형성되기에 이르기도 했다. 


사실 82년 KBO 출범은 그 이전, 고교대회나 실업팀들의 아마야구에 쏠려 있던 한국 야구팬들의 관심을 본격적으로 프로리그로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일각에서는 당시 전두환 독재 정권이 정권의 안정화를 위해 추진한, 이른바 '3S' 정책의 일환이었을 뿐이라 폄하하기도 한다. 물론 정권 차원에서 프로야구 및 다른 프로 스포츠를 활용한 면이 없잖았지만,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프로야구나 이런 스포츠 이벤트라도 없었더라면 매일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던 당시의 어른들, 젊은이들, 노동자들의 하루의 피로를 무엇으로 풀었을지도 의문이긴 하다. 지금처럼 문화 콘텐츠가 다양했던 것도 아니고, 표현의 자유가 살아있던 것도 아니고, 해외 문물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니, 결국 스포츠 이벤트가 그나마 스트레스 해소의 창구가 되어 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민주화를 방해하는 도구가 되었다, 정권의 주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좀 많이 나간 주장이다.


내 아버지는 딱히 선호하는 스포츠도 없고 응원하시는 팀도 없었는데 (양친이 모두 강원도가 고향이시라, 강원도 연고의 팀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고...), 오히려 어머니가 당시 분위에서는 조금 특이하게도 야구를 참 좋아하셨다. 가끔씩 집안일하시다가도 무심결에 저녁 시간 TV에서 야구 중계가 나오면 관심을 보이시며 투수와 타자를 알아보시고 경기에 관심을 보이셨던 기억이 난다. 야구 규칙을 하나씩 이야기해 주시고, 이 상황에서 왜 주자가 뛰거나 멈추는지도 설명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을 그 당시, 30대 초중반 부모님은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시고 딱히 스트레스 풀 대상이 없으셨을 텐데도 그저 TV 연속극, 라디오, 그리고 야구 중계 등으로 그렇게 젊은 나날을 보내셨던 것인데, 두 아들들 키우시랴 그렇게 젊은 나날을 보내시며 얼마나 하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참아가며 일하시고 가정을 돌보셨는지, 이제야 내가 두 형제의 아비가 되어 보니 아주 약간은 알 것 같다. 아쉽게도 아직 우리 집 사내 녀석들은 야구에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관심을 잡아 끌 콘텐츠가 넘쳐 나는 세상이라, 세 시간짜리 공 던지고 치고 달리는 게임을 가만히 넋 놓고 보기는 무리일 것이다. 이렇게 야구라는 스포츠가 점점 나이 든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인가 생각하면 다소 서글퍼지기도 하다.


벌써 40년 다 되어가는 추억이지만, 지금도 한대화 선수의 쓰리런은 어머니가 가끔씩 꺼내시는 추억이다. 내가 야구를 즐기게 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지 않나 싶다. 희한하게도 한국 프로야구보다는 메이저리그로 관심이 틀어졌던 것이 재밌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계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보따리를 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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