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간의 악마화가 불러오는 정치적 동역학의 결말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중식당에 가서 각자 식사를 시키는데, 어떤 사람은 짜장, 어떤 사람은 짬뽕을 시킨다. 그런데 짜장을 시킨 사람들이 만약 짬뽕을 시킨 사람들을 '다른 편'이라고 간주하고, '우리 짜장 파들은 탕수육도 좋아하니 우리끼리 탕수육 시키겠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졸지에 짬뽕파가 된 사람들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므로, '거 탕수육 먹을 거면 우리도 같이 먹읍시다'라고 제안할 리 거의 없을 것이고, 오히려 '우리끼리도 탕수육 먹읍시다!'라고 짬뽕파의 누군가가 제안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탕수육 한 그릇 시키면 모두가 잘 먹을 수 있을 것을, 탕수육 두 그릇 시킴으로써 전체적인 1/N 비용은 늘어난다. 혹은 탕수육과 깐풍기 각 한 그릇씩 시켜서 골고루 나눠 먹어 볼 수 있었을 가능성이 탕수육 두 그릇으로 변질되면서, 모두가 다양한 메뉴를 맛 볼 기회가 반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는 실로 굉장히 복잡하다.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 복잡도는 점점 증대된다. 외교, 국방 같은 거시적 문제부터, 교육, 부동산, 금리 같은 생활에 밀접한 사안, 동성애, 낙태, 집합 금지 정책 같은 첨예한 대립을 불러오는 사회적 사안부터, 부가가치세나 지하철 요금이나 담배 가격 인상 같은 문제까지 각자의 의견은 실로 천양지차다. 각 문제를 N차원 하이퍼 공간으로 치환하여 각 차원에서의 개인의 의견을 위치를 찍으면, 어떻게 클러스터링 하느냐에 따라 이리 묶일 수도 있고 저리 묶일 수도 있을 것이다. 클러스터의 개수에 따라, 혹은 클러스터링 하는 방법에 따라, 아침에 같은 클러스터였던 것이 저녁에는 다른 클러스터가 수도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클러스터링을 자의적 기준에 따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의적으로 한다'는 것은 개인이 정한 불과 몇 개의 기준으로 상대를 쉽게 이진화, 즉, 적이냐 친구냐로 나눈다는 것이다. 짜장과 짬뽕이라는 우스운 기준으로도 이렇게 쉽게 적과 친구가 나뉘는데, 하물며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안에 대한 개인 간 의견의 차이는 곧바로 적과 아군을 나누는 기준으로 비화될 수 있다. 불행히도,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각자를 이진화시켜 스스로의 클러스터링을 정하는 기준 역시,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나는 저 사람의 클러스터에 들어 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 경우 결국 감정은 상하고 이성적 판단의 범위는 제한되며 커뮤니케이션에는 오해가 증폭된다.
정견의 차이로 인해 이렇게 이진화가 진행되면서, 이것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세력 혹은 입장을 대변하는 공당 혹은 조직으로 대변되면 사회적 맥락에서의 문제는 더욱 공고해진다. 이 과정에 나오는 것이 상대 당 혹은 조직까지 쉽게 이진화시켜버리는 것이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 당의 오피니언 리더 중, 극단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견을 그 당 혹은 조직의 전체 의견인 양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만약 짬뽕파의 누군가가 '역시 탕수육은 부먹이지. 부먹이 진짜 탕수육이야. 다른 것은 허접해!'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러면 짜장파에서 누군가가 '보셨죠? 저 짬뽕파들은 탕수육도 분명히 부먹파일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짜장파들은 찍먹파의 상식을 유지할 것입니다. 부먹파 같은 몰상식한 행위는 우리 사회의 안전성을 갉아먹는 행위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짜장파에서 한 두 명씩 나오기 시작한다면 갑자기 짜장파의 다수와 짬뽕파의 다수는 본인들의 탕수육 취향, 아니 정치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각 조직의 탕수육 취향이 양극단으로 결정되어 버린다. 그러면서 처음 짬뽕파에서 부먹을 이야기한 사람과, 그것의 비합리성을 지적한 짜장파의 사람은 각 조직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버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각 조직의 대변인인 양 간주해 버린다. 이 과정에서 짜장파 중, 부먹을 좋아했던 사람들, 그리고 짬뽕파 중, 찍먹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게 된다. 괜히 나서서 자신의 탕수육 취향 이야기했다가 어느새 각 조직의 대표 오피니언이 된 각 취향에 대한 반발로 비쳐, '너 배신자냐? 그럴 거면 저 조직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사실 상대 조직 혹은 적의 입장을 적의 일부가 갖는 극단주의로 치환하여 단순하게 이진화시켜버리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우리 조직을 규합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이른바 적의 모습이 뚜렷해지는 효과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2015년 초반,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왔던 트럼프가 경선에 참여할 당시만 해도, 실제로 트럼프 같은 극단주의자가 정말 공화당이라는 유서 깊은 미국의 공당 대선 후보가 될 것이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민주당에서는 물론, 공화당 내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대변하는 미국의 소외된, 이른바 러스트 벨트 지역의 백인 노동자 계층 혹은 동남부 레드넥들이 트럼프를 수면 위로 나오게 했다고 주장하는데, 물론 그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이전에 사실 트럼프를 거의 조롱조로 무시하고, 나중에는 공화당 자체를 트럼프 같은 미치광이가 후보로 나올 수도 있게 만드는 멍청한 조직이라고 폄하하거나 무시했던 민주당 측의 이진화 프로파간다 역시, 민주당의 세력을 규합하는 것보다는, 트럼프가 실제로 공화당의 후보로 더 공고하게 자리매김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트럼프라는 우스운 인물이 공화당 주자가 되면 더 공격하기 쉽고, 당의 공격 지점이 명확해지므로 이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트럼프는 어느새 too big to fail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려 말기 설화에 나오던 불가사리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경선 초기, 그리고 대선 레이스 초기에는 트럼프를 놀리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이진화하여 격하하고 무시하는 전략이 제법 통하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많은 여론조사에서는 트럼프의 승리 가능성은 늘 힐러리에 뒤진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겉보기와는 달리, 짬뽕파의 찍먹파들이 찍먹을 포기하고 부먹으로 간 것을 놓쳤다는 것이고, 짜장파의 부먹파들이 조용히 부먹을 감춘 해 부먹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극단주의를 공격하고, 또 공격을 받으면서 방어하는 목소리들만 커지다 보니, 그 목소리에 가려진 다양한 그리고 넓은 범위의 정견을 갖는 상식적인 유권자들의 의견은 가려졌으며, 각 유권자들은 단지 그 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극단주의의 지지 세력 혹은 공격 세력으로 간주해 버리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결국 공화당의 많은 지지자들은 반발심으로 더더욱 트럼프를 자신과 동일시해버리는 결과를 보였는데, 적어도 그렇게 된 원인의 절반은 적대 세력이 트럼프를 극단주의자이자 공화당 자체를 극단주의자 혹은 멍청이들의 집합으로 매도한 행위에도 기인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 트럼프는 4년 간의 삽질 끝에 아슬아슬하게 재선에 실패했고, 이제야 상식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든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안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제2, 제 N의 트럼프는 언제든 이러한 방식의 극단주의 이진화의 동역학 속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당에서 일지, 공화당에서 일지, 한국에서라면 더 민주에서 일지, 국민의 힘 계열에서 일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vs 구도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라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극단주의자로 포지셔닝시켜서 그 누군가가 속한 조직을 극단주의 그 자체로 몰고 가는 모양새가 모종의 계기로 눈덩이처럼 굴러가기만 하면 트럼프의 당선 과정이 다시 재현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 과정에서 제 N의 트럼프 같은 극단주의자가 미국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 나라에서 이러한 극단주의 이진화 동역학으로 인한 지도자가 출현할 경우, 앞서 이야기했듯, 사람들의 다양한 정치적 의견 스펙트럼은 델타 함수로 바뀌고, 탕수육만 찍먹으로 먹어야 하든지, 찍먹 부먹 상관없지만 탕수육만 먹어야 할 수도 있으며, 필요 이상으로 탕수육만 먹다 보니 비용이 낭비될 수도 있고, 깐풍기 레시피가 사라질 수도 있게 되는 피해가 발생한다. 사회적 비용은 상승할 것이고, 정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제도와 정책은 큰 마찰력을 동반한 채, 주기적으로 감쇠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이 상태도 아니고 저 상태도 아닌 동역학을 보이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극단주의자가 아닌, 극단주의자들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의견과 다양성이 묵살되어버린, 그리고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비용 상승을 세금이라는 형태로 떠맡게 된 보통 시민들이다.
또한, 이번에는 운 좋게 넘어갔지만, 운이 안 따를 경우, 그 나라에서의 극단주의가 국경을 넘어 지구 단위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수도 있는 것 역시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부분이다. 자의든 타의든 극단주의자의 동역학에 힘입어 정권을 잡은 세력이 정권의 연장이나 안위를 위해 언제든 반대 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바이고, 당연히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므로, 21세기에도 다시 재현되기에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트럼프는 지극히 예외적인 outlier일 뿐이고, 앞으로는 상식적인 정권 교체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트럼프 현상은 단기적인, 그리고 미국이라는 환경 때문에 생기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 생각에는 그것은 시기나 나라의 문제가 아닌, 수학적 추상화를 거쳐 생각건대, 어느 나라에서든 어떤 시점에서든 어떤 계기로든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사례다.
복잡한 데이터를 이진화하면 정보량도 압축되고 이해도 빨라진다. 그렇지만 이진화하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에 걸쳐 있던 정보는 threshold value (문턱 값) 하나가 유일한 준칙이 되어 0 혹은 1로 운명이 나뉜다. 정보 처리의 편의 혹은 속도와 정보량은 반비례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처리해야 하는 정보는 점점 늘고 있고, 본인의 삶의 문제만 해도 산적해 있으니, 정치적 사안 하나하나를 꼼꼼히 들여다 보고 상대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과 비교해 보는 참을성을 갖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몇 가지 해석하기 편리한, 그러나 그만큼 그에 비례하여 극단적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 혹은 의견을 기준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 과정에 다양한 스펙트럼, 층위의 정보와 의견, 그리고 아이디어와 마이너리티의 데이터는 0과 1로 처연하게 갈비뼈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편하고 골치도 덜 아프므로, 자연스레 이른바 핫한 혹은 어그로가 끌리는 사안을 중심으로 극단주의가 형성되고, 주의 깊지 못 한 일부 세력이 상대를 그러한 사안을 중심으로 극단주의자화시켜버리면, 두 진영의 대표는 결국 극단주의 정견으로 수렴하게 되며, 상대는 그 극단주의를 신봉하는 악의 세력으로 갑자기 전락해버린다. 이러한 동역학은 미국에서만, 혹은 특정한 시점에서만, 혹은 특정한 체제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라면 규모에 상관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극단주의의 맹아가 열매로 이어지는 과정을 견제하는 수밖에 없다. 극단주의로 누군가를 포지셔닝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상대를 다시 극단주의로 몰고 가서 정치적 이진화를 이끄는 환경을 늘 유의 깊게 봐야 한다. 그것을 선동하는 세력이나 포지션이 어딘지를 봐야 한다. 언론일 수도 있고 공당일 수도 있고, 블로거일 수도 있고, 헤비 트위터리안일 수도 있다. 맹목적인 이진화를 추종하기 전에, 정말 내가 공격하는 그 사람 혹은 그 조직의 전체 의견이 그러한 극단주의로 통일되어있는지 자문해 봐야 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공론의 장에서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싸움은 빈발할 것이고, 공방은 거듭될 것이지만, 그래도 그러한 다툼이나 싸움 과정에서 정보가 어떤 형식으로든 공개되고, 오해하고 있는 지점이 드러나게 되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생성되는 것 자체가, 서로를 극단주의로 cut-out 하여 서로의 디딤돌을 칼 자르듯 나눠 버리는 행위보다는 백만 배 낫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제 N의 트럼프의 맹아를 만들고 있는 것이 정치적 판단의 편리함이라는 미명 하에 상대를 악마로만 보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근시안 혹은 시야의 좁음 때문이 아닐까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상대를 악마화 시켜버리면 결국 그 악마의 눈동자에는 또 다른 악마가 비칠 뿐이다. 'When you stare into an abyss, the abyss stares back to you.' -F. Nietzsc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