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경로는 GPA로 대변되지 않는다.
아마존 창업자이자, 지구 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사람인 제프 베이조스는 마이애미의 한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아이비 명문 프린스턴에 입학했다. 그가 원래 하려던 공부는 물리학, 그중에서도 아마 이론물리학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학부 양자역학 수업에서 이른바 천재급 동기들과의 현격한 차이를 깨닫고는 이내 전공을 EECS로 바꿔 4.2/4.3의 굇수급 GPA를 찍고 졸업했다. 물론 졸업하자마자 바로 아마존을 창업한 것은 아니었고, 작은 회사에서 프로그래머 경력을 몇 년 쌓다가, D.E.Shaw 같은 퀀트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전자상거래와 금융 네트워크 관련 커리어를 키우고, 90년대 초반, 불과 30세의 나이로 아마존을 창업한다. 그 이후의 스토리는 워낙 유명하니 덧붙일 말이 없다.
며칠 전 20일, 미국의 화성 탐사선 퍼시비어런스 (perseverance)호는 무사히 화성에 착륙했다. 이 프로젝트의 세부 책임자는 Ben Cichy라는 사람으로서, MS에서 윈도우 개발팀에서 SW 엔지니어로 경력을 시작한 후, USC에서 항공우주공학 석사를 취득한 후, 이번에는 우주항공분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커리어는 개발자로서였다. 나사로 이직하여 이후 무려 16년이나 우주 탐사선 항행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하다가, 최근에는 상업용 우주여행 로켓 개발사인 블루 오리진으로 옮겨 시스템 개발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이 양반은 나사에 재직할 때 Mars 2000 같은 거대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바 있었고, 나사에서 이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그의 Linkein 참조). 그는 퍼시비어런스 호가 화성에 무사히 착륙하던 날, 첨부한 그림과 같은 트윗을 올렸다.
트윗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Curiosity and perseverance matter. 사실 큐리오시티와 퍼시비어런스 모두 미국의 화성 탐사선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다분히 의도적인 문장이다.^^
어쨌든 그의 트윗 고백처럼, Ben의 학부 성적은 2.4 정도로서 처참한 수준이다. 물론 그가 나온 학교가 Cornell 같은 명문 아이비 대학이니, 그 안에서도 살인적인 경쟁이 있었음은 예상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런 GPA를 받으면 아마도 그 분야의 전공 공부를 살려 커리어를 이어 나가기가 망설여할 것이다. 그 분야에 대한 적성이 없는 것으로 스스로 지레짐작할 수 있고, 아마 주변에서도 '굳이 그 전공으로 커리어 쌓으려 할 필요 없다'라는 식의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줬을 수도 있다. Ben 역시 낙담할만한 GPA를 받고 이러한 고민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결국 그의 전공을 놓지 않았고, 그가 개발한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그는 마침내 평균 거리 2억 2천만 km 떨어진 붉은 행성에 탐사선을 무사히 착륙시키는 과정을 그의 눈으로 직접 지켜봤다. 그가 코넬을 졸업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Ben이 다녔던 Cornell 같은 명문 학교 역시, 제프 베이조스가 프린스턴 물리학 학부 전공 과정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굇수급의 동기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Ben 역시 제프 베이조스처럼, 특정 전공과목(들)에서 현격한 실력차를 몇 번 경험했었을 것이고, 제프 베이조스처럼 전공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GPA를 더 높여 거의 수석급으로 졸업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지금과는 사뭇 다른 커리어를 쌓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2.4 GPA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쨌든 CS 전공을 끝까지 'perseverance' 하여 졸업,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개발자로서 실무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런데, Ben은 안정적 (?) 직장이었을 MS, 그것도 윈도우 개발팀이라는 핵심 보직을 뒤로하고, 다시 항공우주공학 석사 공부를 한 후, 나사에 합류하여 스페이스 프로그램 개발팀에 합류한다. 그에게 perseverance 뿐만 아니라, 평범한 것은 못 견뎌하는 curiosity도 있었지 않았을까 라고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제프 베이조스처럼 GPA 사수를 위해 전공을 바꾸고, 그 전공을 배경으로 다양한 커리어를 거쳐 거대한 회사를 만드는 것도 인생이지만, 벤 치치처럼 GPA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공을 유지하되, 그 전공을 배경으로 호기심과 인내심을 지켜내며 본인의 흥미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도 인생이다. 물론 GPA는 일종의 성실성 척도는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 전공에 대해 얼마나 인내를 가지고 공부를 했고, 얼마나 호기심을 계속 가지고 커리어를 쌓아 갈 것인지까지는 보여 주지 않는다. 성실성이나 적성을 판단하는 1차적인 필터는 될 수 있겠지만, 결국 GPA는 4년 공부의 흔적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4년 공부한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GPA로 학생들의 인생 경로를 미리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도 깨닫게 된다.
베이조스의 인생 경로든, 벤의 인생 경로든, 개인의 인생은 결국 개인의 것이고, 책임도 개인이 진다. 그렇지만, 적어도 대학에서의 전공 공부에 대해 GPA로 대변되는 결과만 받아 들고 그것에 집착하거나 미리 좌절하거나 미리 포기하거나 호기심을 놓아 버릴 필요는 없다. 특히 이공계 공부는 4년 과정이 힘들기로 유명하고, 공부가 어렵기로 악명 높지만, 어쨌든 존버하는 학생들이 살아남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인내를 배웠는지, 그 과정에서 전공에 대한 호기심을 찾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호기심을 못 찾았다면 전공을 바꾸되, 호기심을 찾았다면 그것을 더 파고들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4년 간 길러 왔던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번 퍼시비어런스 호의 무사 착륙에 지대한 공헌을 한 벤이 현재 일하는 회사 블루 오리진은 다름 아닌 제프 베이조스가 설립한 회사다. 누군가가 전공을 바꿔 경력을 바꿔 모험을 하며 쌓아온 경로의 한 노드에, 누군가가 전공을 지키고 존버를 하고 호기심을 유지한 채 달려온 경로가 안착한 셈이다. 베이조스의 경로가 없었다면 벤의 경로도 달라졌을 것이고, 벤의 경로가 없었다면, 베이조스의 경로에도 변동이 생겼을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그래서 길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런 에피소드에서도 다시금 배운다. 결국 남는 것은 존버고 호기심이다.
Curiosity and perseverance ma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