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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Jul 13. 2021

실험의 중요성

잘 계획된 실험도 중요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끈기다.

얼마 전 나는 인터넷에 공개된 백선생 레시피를 보며, 집에 있는 에어프라이어를 활용하여 치킨을 무진장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간장치킨봉 요리를 해 주고자 많은 준비를 하였다. 인터넷 레시피대로 재료를 모조리 준비하여 싱크대의 엔트로피를 한껏 높여 놓고, 정성껏 계량하여 혼합물을 준비하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었으나, 그 이후부터 갑자기 계량하고 온도 재고 시간재는 것이 귀찮아졌다. 일단 준비한 닭봉을 씻어서 핏물을 빼고 간장 양념 혼합물에 go to bed 시켰다. 수 시간이 흐른 후, 잠자고 있는 닭봉을 깨워 에어프라이어 용기에 기름종이를 깔고 조심스레 겹쳐서 장착시켜 놓았다. 레시피대로 180도로 맞춰 20분을 돌려놓고, 기대에 찬 아이들에게 이 요리는 아빠의 필생의 역작이 될 것이며, 더 이상 교* 치킨을 시켜 먹는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강력한 암시를 주었다. 배고픈 아이들의 눈망울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20분이 지난 후 모두의 기대 속에 나는 에어프라이어의 용기를 꺼냈다. 아뿔싸. 3층으로 적층 된 닭봉들 중, 가장 위층의 닭봉의 겉만 브라운에 가깝고, 1층은 아직 하얀 상태, 2층은 애매한 누런 색깔로서, 도저히 먹고 싶은 비주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애들에게 '이제 전반전 20분이 끝난 것이야. 후반전 20분이 남았지. 사람은 모름지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해. 20분만 더 기다려 보자'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눈은 실망으로 가득 차고, 눈치 없는 둘째는 빨리 교* 치킨이나 시켜달라고 졸라대었다. 큰 애는 이미 몇 번 아빠의 요리가 얼마나 안드로메다에 가까운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접은 듯한 표정이었다.


다시 후반전이 시작되고 10분 정도나 지났을까, 에어프라이어에서는 심상찮은 향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예의 교* 치킨의 그 알싸한 마늘간장 향이 아닌, 캬랴멜 라이즈드 뽑기의 타는 냄새가 나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에어프라이어의 전원을 뽑아 버리고 환풍기를 켜고 집안의 문이란 문은 다 활짝 열어 두며 내 야심작을 어떻게든 살려 보려 갖은 애를 썼다.


상황이 수습되고 요리의 상태를 살펴보니, 3층은 숯으로 변해 있었고, 1층은 여전히 새하얀 상태, 2층은 덕지덕지 양념이 누룽지처럼 들러붙어 있는 지옥에서 온 것 같은 닭봉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마 아이들에게 '자 드디어 일요일은 아빠가 요리사! 작품이 나왔습니다~꿍따라따라 뽕짝 뽕짝~'의 엉덩이춤을 선보이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없는 수준의 작품이었다. 나는 긴급히 스마트폰의 교* 앱을 찾아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으로 간장치킨 주문을 눌렀고, 아이들에게는 '이거 뭐야. 백** 아저씨, 이 사람 못 쓰겠네. 인터넷 레시피는 믿을만한 것이 못 돼.'라고 말하며, 아쉽지만 오늘의 요리는 이론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요리 노트에 적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배고픈 아이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기 직전, 다행히 구세주 같은 치킨 배달원의 현관 노크소리가 들렸고, 나는 재빨리 간장치킨을 아이들에게 펼쳐 놓으며 '대기업에서 표준화된 기술로 표준화된 공정을 거쳐 제품을 만드는 것이 이렇게 위대한 것이다.'라는 일장연설을 하면서 아이들이 정신없이 치킨을 먹는 와중에 내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내 에어프라이어 닭봉 요리가 실패한 까닭은 백** 선생의 레시피가 이상해서가 아니다. 내가 프로토콜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시피를 자세히 읽어 보니, 20분간 그냥 에어프라이어에 놔둘 것이 아니라, 10분 익히고, 뒤집고 다시 10분 익히라고 되어 있다. 그 와중에 브러시로 간장 양념을 처덕처덕해야 한다는 지시도 보였다. 나는 레시피의 첫 문장만 읽고 귀찮아서 대충 다이얼만 돌린 채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20분간 겉만 익혀졌으니, 닭봉들이 isotropically annealed 였을 리 만무하다. 3층 닭들이 지옥의 스코칭 히팅에 시달리는 동안 1층 닭들은 오히려 싸늘한 느낌마저 느끼면서 추웠했을 것이다. 


04년에 KIST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제일 먼저 받은 임무는 내가 속한 연구팀이 03년 하반기부터 착수한 반도체 나노선, 나노쉬트의 합성에 대한 것이었다. 내 석사 전공은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는 고분자-금속 박막의 패터닝 공정 그리고 그 와중에 생성되는 wrinkling pattern의 self-organization에 대한 것이었고,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정말 최소한의 실험만 하면서 선배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데이터를 얻어 간신히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갑자기 해보지도 않은 수열합성법, 졸젤 합성법을 이용하여 반도체, 그것도 화합물 반도체, 산화물 반도체를 나노선 형태로 만들라는 임무가 떨어지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한 1년 정도 정말 고생고생하며 치가 떨릴 정도로 실험을 반복하여 겨우겨우 쓸만한 데이터를 얻었는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반복했는지, 지금도 그 시절 연구노트를 펼쳐 보면 곳곳에 처절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오래 걸릴 성격의 실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이유는 사실 논문에 적힌 레시피가 불충분한 정보를 주고 있다는 이유보다는, 내가 내 멋대로 실험 프로세스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실험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업데이트된 다른 연구자들의 실험 논문을 보며 내가 무엇을 오해했고 무엇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는지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부분을 address하니 실험은 거짓말처럼 잘 진행되기 시작했다. 가장 압권이었던 부분은 얇은 실리콘 substrate를 특정한 용액에 띄우는 과정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그때까지 위를 바라보며 띄우라는 것으로 해석했었고 실험은 계속 실패했던데 반해, 논문에서는 upside down이라는 표현이 분명히 있었고, 그래서 뒤집어서 띄워 보니, 과연 반도체 나노선이 자라났다는 것이었다. 실험 샘플을 SEM으로 관찰하면서 한 편으로 와 진짜 되긴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한 편으로는 6개월을 그간 삽질로 날렸던 스스로에게 한심한 마음이 드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험을 잘하는 분들과 요리를 잘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것 외에도,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존중하며 실험자 (요리사)의 자의적 해석을 최대한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 물론 요리대회에 나가야 하거나, 미쉐린 3성급 레스토랑에서라면 개성 있는 요리가 나와야 하고, 네이처 사이언스 등의 저널에 실릴 정도라면 남들이 안 해본 실험을 시도해야 하겠지만, 보통은 기본기와 표준화 프로세스를 잘 따라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forget it! 하는 것은 기본기와는 거리가 매우 멀고, 10분 후에 뒤집고 다시 브러시로 양념을 바른다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은 isotropic solvent-assisted thermal annealing이라는 표준 공정을 무시하는 처사다. precursor 용액의 표면에 직접 접촉을 시켜 interface-driven growth를 가능하게 해야 하는 공정을 무시한 채, 실험자 편하자고 대충 띄워 놓고 오븐 문 닫은 채 다음날 아침에 와서 샘플 확인하고 실망한 채 샘플 폐기 처분하는 것 역시 실험의 기본기와 표준화 프로세스를 따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물론 요리와 실험이 무조건 틀에 박힌 레시피와 표준화 공정과 기본기로만 대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우연한 실수로 새로운 요리와 실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수없는 실험 삽질을 하면서 sol-gel film의 wrinkling을 최초로 발견하여 보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wrinkled surface에서도 나노선이 자라날 수 있다는 것도 보고하기도 했다. 삽질이 없었다면 얻을 수 없는 실험 결과이긴 했다. 짜파구리 역시 의도된 요리라기보다는 아마도 배는 고픈데 라면은 두 개 먹고 싶고, 그렇지만 집에 있는 것은 짜바** 와 너** 밖에 없는 어떤 이가 그냥 스까 먹어보자라는 의도에서 우연한 천상의 맛이 발현된 결과물일 수도 있다. 다양한 실패와 시행착오는 분명히 경험치를 쌓게 해 주고, 가끔씩 우연의 성공을 가져다 주기도 하기 때문에, 분명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좋은 실험은 철저한 계획과 주의 깊은 시행과 중간중간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기본기와 결과에 대한 고찰이 뒤따르는 철저한 과학적인 행위다. 요행을 자꾸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실험에는 돈과, 자원과, 에너지와, 사람의 노력이 소모된다. 반복된 실험을 장시간 버텨내며 실패를 감내하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으면 그 실험은 그냥 실패하는 것이다. 요리 역시 재료와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고, 한 두 번 실패한 요리는 배고픔을 반찬삼아 대충 먹어치울 수 있겠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요리와 멀어지고, 요리가 아닌 끼니 때우기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실패한 요리다. 


이론이나 수학적 모형이 아무리 정교하고 내부적인 정합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인류가 자연을 이해하는 가장 큰 발걸음은 실험에서 나온다. 한 때는 물리학에서도 실험 결과가 저만치 앞서가고 이론이 허겁지겁 뒤따라오던 시대도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이제는 대부분의 물리학에서는 이론은 이미 저만치 상상의 나래를 펼칠 정도로 나아가고 있는데, 실험은 그것을 뒤쫓아 오지 못 한다. 그렇지만 이론 물리학자 그 누구도 함부로, '실험의 진보가 왜 이리 느리냐'라고 타박하지는 못 한다. 물리학, 특히 입자 물리학에서의 믿을 수 있을만한 고품질의 실험 데이터는 점점 얻기 어려워지고 있으며, 이론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제안한 입자나 개념의 증거를 찾기 위해 더 큰 가속기, 더 센 에너지, 더 비싼 검지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각국의 연구개발 예산은 결국 한정되어 있고, 각국의 국회와 시민들은 점점 언제 열매가 나올지도 모를 거대과학의 투자 가치에 회의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실험 물리학의 노력으로 그 간극이 좁혀지는 추세라면 그것이 positive feedback이 되어 다시 이론의 진보를 추진시키고 이론은 새로운 경계선 너머 탐험을 지속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실험 물리학의 노력은 많은 학자들의 기대만큼 재빠르게 업데이트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실험 물리학이 게으르거나 덜 똑똑해서가 아니고, 믿을만한 실험적 증거를 찾는 것이 그만큼 지난한 과정과 검증과 오랜 시간과 많은 이들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각과 후각을 거쳐, 소화 기관에 들어가 인간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음식물은 요리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 인식의 지평은 결국 그것을 이해했다는 증거를 요구하며, 그 증거는 잘 설계된 이론적 프레임에 기반하여 잘 계획된 절차를 거쳐 얻어진 실험 데이터에서 나온다. 누군가에게는 기껏 한 끼의 식사를 위한 요리일 뿐이겠고, 누군가에게는 기껏 이름 모를 저널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연구 논문의 일부일 실험일 뿐이겠으나, 그 요리가 어떤 이의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그 실험 하나가 어떤 혁명적인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모름지기 치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닭봉을 에어프라이어로 요리할 때 10분마다 반드시 뒤집고 브러시로 양념을 성의껏 발라 준 다음, 층을 바꾸어 다시 10분 간 잘 익히고, 중간중간 궁금하다고 뚜껑을 열어보는 우를 범하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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