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누리의 추억

전화선 모뎀으로 세상과 연결되었던 그리운 시절

by 원현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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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 미쓰홍' 이라는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다. 드라마의 배경이 1997년인데, 정감 느껴지는 배불뚝이 CRT모니터와 컴퓨터 본체 안에서 치르륵 치익치익 소리를 내던 하드디스크의 소음까지 화면에 넣어서 만든 걸 보고 정말 고증이 잘 되어있는 드라마구나 생각을 했다. 특히 그 드라마에서 내가 시선을 떼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증권사의 찌라시를 전문으로 올리는 '여의도 해적단'의 파란 바탕의 흰색 글씨 화면이었다.

그 당시에는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 PC통신 커뮤니티라고 불리는 온라인 게시판, 대화방, 자료실의 종합 서비스가 있었다. 대학생들은 주로 나우누리에서 활동했는데, 천리안, 하이텔은 월 정액 얼마를 매월 납부해야 하는 유료 서비스였지만, 나우누리는 대학생에 한해서 무료 아이디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멤버들을 모아 특정 그룹을 만들고, 게시판과 자료실을 운영하는 형태는 지금의 SNS와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속도 문제로 주로 글만 작성하던 그 시절 PC통신 커뮤니티는 지금 세상에는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특히 나우누리에 특화되어 있던 기능이 '쪽지 보내기'였다. 아이디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글자 수에 제한이 있어서 트위터의 원류 같은 느낌도 있었겠구나 싶다. 그녀에게 전해야 할 정말 꼭 필요한 말만 꾹꾹 눌러 담아서, 두근두근하며 쪽지를 보내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특히 '이름으로 찾기' 기능이 있어서, 소개팅에서 나에게 나우누리 아이디를 알려주지 않았던 특이한 이름의 야속한 그녀를 찾아 분노의 쪽지를 날렸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왜 늘 이런 부끄러운 기억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나우누리 게시판의 또 다른 좋은 기능은, 어떤 편견도 없이 그 사람이 올린 글을 읽고 그 사람의 현재 심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핫한 플레이스를 찾아 좋은 구도의 사진을 찍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지금 내가 느끼는 답답함이나 현재 심정을 아이디라는 익명에 숨어 글로 남길 수 있었다. 예의 덕수궁의 그녀를 만났던 곳도 이 나우누리의 아마추어 글 창작 게시판이었고, 오늘 얘기할 C를 만났던 곳 역시 이 나우누리 게시판이었다.

C의 글은 정말로 빛이 났다. challang이라는 아이디를 가지고 있는 그녀였는데, 그 아이디 그대로 그녀의 글에서는 찰랑찰랑 물결치는 햇빛이 반사되어, 읽는 내내 파란 모니터 화면에 구슬 같은 단어의 물방울이 흩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지. 순수한 팬심으로 그녀에게 글을 너무 잘 읽고 있다는 쪽지를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덕수궁의 그녀와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는데, 의외로 '나는 누구일까요'라는 스무고개의 첫 질문을 받게 된다.

나도 몇 편의 글을 올렸던 상황이라, 그녀의 흥미를 끈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스무고개라니. '작가이신가요?' 아니요. '학생이신가요' 학생...이지요?, 처럼 상대방을 탐색하는 작은 긴장의 쪽지가 오고 갔고, 쪽지가 오고 감에 따라 베일에 쌓여 있던 그녀가 서서히 실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너무나 반갑게도 그녀는 내가 다니던 대학의 국문과 전공을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내가 같은 대학의 공대생이라는 정보를 흘리게 되었고, 그녀는 순수하게 그런 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와 쪽지를 이어갔던 것이다.

그녀의 대강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당장 인문동으로 내려가 그녀를 볼 수 있는 상황이라 적잖이 흥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결정적인 정체는 숨기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스무고개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딴 스무고개는 빨리 집어치우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런 빛나는 글을 쓰는 분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인스타그램 따위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녀의 글과 그녀에 대한 상상력이 자유롭게 떠다니며 더욱더 기대감을 부풀게 하는 상황이었다.

몇 날 며칠을 설득해 학교의 인문대 앞의 조그마한 호수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을 때는, 첫 데이트의 Y를 만나기 전과 같은 묘한 흥분에 정신을 못 차렸다. 나는 그때의 어리숙한 내가 아니었고, 이제는 이성과 진지하게 그녀의 글에 대해 문학적 토론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된 거 아닌가 라는 기대였다. 실제로 순수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을 처음 본다는 떨림도 있었다.

어떻게 처음 만난 찰랑을 알아봤는지에 대해서는 외모적으로는 큰 기억이 없다. 스무고개 쪽지를 나누는 동안 외모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었다. 다만, 나는 단번에 그녀가 찰랑임을 알 수 있었다. 한없이 빛나지만 또 한없이 차분했던 그녀의 글의 문체와 그녀는 완전히 닮아있었다.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글에서 그 사람의 외모나 인격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어느 정도 믿는다. 실제로 작가를 보면 이런 느낌을 받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순수하게 학문적 호기심 혹은 작가적 호기심으로 나를 만났을 뿐이었다.

그간 나눴던 수많은 쪽지로 친근하긴 했지만, 너의 만남과 지금 하고 있는 얘기는 훗날 나의 글에 대한 재료가 된단다.라는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태도는 역시나 혹시라도 그녀와 연인이 되는 계기가 있을까 싶었던 내 기대의 불씨를 가볍게 훅 불어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대신에 글 잘 쓰는 사람에 대한 경외감은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내 겉멋만 가득했던 글에 대한 충고를 성심 성의껏 해주었고, 나는 대가의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그녀의 충고를 열심히 새겨들었다.

호기심이 충분히 충족되었는지 그 뒤에 그녀는 나의 쪽지에 바로바로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으며, 나는 여전히 그녀의 글에 대한 팬 n호로 가끔 게시판에 그녀가 글을 올리면 아끼고 아껴서 글을 읽곤 했다. 아쉽게도 이름을 분명히 들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아이디 말고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혹시 등단을 해서 지금도 찬란한 글을 세상에 남기고 있다면, 나는 그때로 돌아가 소중하게 한 줄 한 줄 아껴서 그녀의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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