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의 그녀

사랑은 때로는 공포가 되기도 하고

by 원현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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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은 신기한 시기이다. 이제 학생 신분을 벗고 사회에 나간다는 두려움도 있고, 4년간 정들었던 캠퍼스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건,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좀 더 공부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로 바로 사회로 나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휴학을 하거나 군대를 갔거나 그해 졸업을 못하는 친구들을 빼고, 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던 친구들을 빼고 대학 4학년의 졸업여행을 신청한 친구들은 열명정도? 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여행지가 제주도였던 것만 기억나고, 거기서 뭘 했는지, 숙소는 어디었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 보면 그때 과대도 정말 억지로 졸업여행을 준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IMF를 막 지나 온 나라가 어수선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감히 대학생 따위가 흥청망청 어디 여행 가서 노는 게 죄악시되고 부담스러웠던 시절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기 때문에 나는 그때 딱히 집안이 힘들어지거나 하지는 않아서 그 시절 힘들었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매일 티브이에서 나오던 대기업 부도의 뉴스와 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어두운 표정은 기억난다.


과친구 G 역시 졸업여행을 같이 신청한 친구였다. 착하게 생긴 인상 좋은 눈매에 항상 웃는 얼굴이었던 그는 약간 '그해 우리는'이라는 드라마의 최우식을 닮은 모습이었는데, 실루엣의 선이 굵지 않은 수채화 같은 녀석이었다. 대학 4년이 될 때까지 컴퓨터공학과는 정말 수많은 프로젝트와 과제가 진행되어서 한 학년 90명의 엄청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어느 정도는 친해지게 된다.


학기말 과제를 위해 컴공과 전용 전산실에서 유닉스 머신과 밤새 씨름을 하고, 형편 되는 친구 자취방으로 내려가 쪽잠을 자고, 다시 전산실에 좀비처럼 올라가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거짓말처럼 모두가 그리운 친구들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독 G와는 친해질 계기가 많지 않았었다. 소위 말하는 강남의 패션 공대생이어서 그랬을까. 오히려 대학원 들어와서 같은 해에 대학원 입학한 과친구들끼리 우리 이렇게 연구실 과제하다 죽겠다 싶어서 만든, 그러나 운동은 전혀 하지 않는 운동 소모임을 하면서 좀 더 친해진 느낌이었는데, 순박하고 착한 친구여서 진작에 친해지면 좋았을 텐데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졸업여행의 그 사건에 물어보고 싶었다. 사실 그건 친한 친구에게도 물어보기도 조금 어려운 일이라서 결국 물어보지는 못했기에 더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마저 풀어낼 수 있는 그런 사건이었다.


그래도 비행기 타고 가는 여행이라고 김포공항에 모인 친구들은 약간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과대가 어떻게 맞춘, 어떤 여대의 졸업여행과 스케줄을 맞춰 제주도에서 여행지를 같이 다닐 거라고 해서 더 설렜던 것도 있었던 거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중에 잘 생겼던 우리 과 친구들은 일찌감치 오래 사귄 여자친구들도 있고 그랬을 텐데, 나 혼자 그랬던 걸까 싶어서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역시나 기이할 정도로 그때 정말 같이 다니던 여대생 무리가 있었던 건지 어떤 건지도 기억이 안나는 걸 보니 스케줄이 틀어졌거나, 서로가 서로의 무리를 별로라고 생각했더냐 그랬던 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유독 G가 여행 내내 불안해하고, 주위를 살피고 그랬었던 분명히 기억난다. 여행 전에 이 친구가 나의 연애사업의 경쟁자일까 아닐까 싶어서 슬쩍슬쩍 여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봤을 때 G는 분명 자기는 여자친구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여행에 집중을 못하는 모습이랄까. 조금은 이상했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관찰하는 것 같긴 했지만 여행지에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김포공항에서 짐을 찾고 게이트를 나와 헤어질 준비를 하는데, G가 얼굴이 흙빛이 되더니 누군가를 피해 우리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쟤 왜 저러 싶은데, 밝게 안녕하세요~라고 어떤 여자분이 우리 무리에게 인사를 나눴다. 우리 또래의 굉장히 청량하고 예쁜 얼굴의 여자였다. 자기를 G의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그녀는, 우연히 자기도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 내린 상황이었는데 G가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우리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긴 파마머리에, 금방이라도 순정만화에서 나온 것만 같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와 예쁘다. G는 저런 예쁜 여자친구 있어서 참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G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인 것이었다. 여자친구 바래다주고 가겠다고 서둘러 우리와 멀어져 가던 G는 흡사 호랑이에게 목덜미를 물려 질질 끌려가는 가젤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G와 여자친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다른 과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 저 여자애 제주도에 같이 있었어라고 얘기해 주었다. 설마 했는데, 언뜻언뜻 우리를 노려보는 시선 같은 게 느껴진 게 진짜였다. 그녀는 출발할 때 김포공항에서부터, 제주도에서 우리가 노는 곳, 우리가 자는 숙소를 모두 조용히 먼발치에서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스토킹을 간접 경험 해보기나 했지, 그런 상황을 실제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어딘가 스토킹을 하는 여성은 못생긴 외모에 헤까닥 한 것 같은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을 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G의 그녀는 너무나 정상적인, 아니 오히려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잠깐 나도 저렇게 조만간 그녀 밥이 되더라도 매력적인 그녀에게 목덜미를 물려서 질질 끌려가 봤으면 하고 상상했을 정도였다. 훗날 건너 건너 들은 얘기로 G는 몇 번이나 그녀와 헤어지려 했지만,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힘들었다고 했다. 성격이 안 맞거나 해서 그럴 수 있겠지만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장면은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상대를 만나기 위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나 그녀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대상을 기다리다 보면,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의 와이프와 잠깐 헤어졌던 계기가 잘못된 기다림이었다.


과외하느라 지쳤을 그 당시 여자친구를 위해 빵과 우유를 사들고 2시간 여를 기다렸는데, 내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란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였다. 내 정성이 부정 당해 화가 머리끝까지 폭발한 나는 빵과 우유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발로 잘근잘근 밟은 뒤 다시는 안 본다는 생각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당시 와이프를 향한 나의 사랑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이제는 잘 안다. 나는 나의 기다림의 정성이 그녀에게 닿기를 바랐는데 그건 역시 내가 만든 사랑의 잘못된 방향이었다. 극 T인 와이프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힘듦의 안식을 나에게 바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나는 그런 상황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G와 당시의 G의 여자친구도 그런 작은 오해가 생기고 증폭되어 제주도발 김포공항행의 스릴러물이 탄생한 것 아니었을까.


여자친구 없는 삶을 겨우 겨우 살아 내던 나는, 일주일 되던 날 그녀 없이는 평생 살 수 없겠다는 자각으로 그날 저녁에 여자친구의 아파트 앞에서 내려올 때까지 어디도 가지 않겠다고 전화하고 무릎을 꿇고 그녀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빵사건 당시에 갑자기 화를 내던 내가 너무 무서웠다던 와이프는 지금까지의 데이트 때는 전혀 보여주지 않던 눈 작아 보이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겁난 토끼 같은 얼굴로 아파트 현관 기둥 뒤에 숨어서 빼꼼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한달음에 달려가 와락 안으면서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 사귀자고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덩치 큰 곰 같은 떡대가 우당탕 달려와서 자기를 안고 울면 공포물이 따로 없었을 건데, 그 곰 덩치를 피하지 않고 같이 나를 안아 주고받아 준 당시의 와이프가 너무나 고맙다.


아직도 내 맘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와이프를 보며 속상할 때가 가끔 있지만, 사람이 원래 그렇고 사랑이 원래 그렇다는 걸 이제는 잘 알기에 그저 잠든 와이프의 얼굴을 보며 아 아직도 참 귀엽구나 하면서 연신 사랑스럽게 와이프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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