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의 그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그녀

by 원현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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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탈출 경고 너무 잘 되어서 행복하다. 며칠 전에 오래된 코드로 동작하는 인터넷 게시판글 날린 이후로, 대책을 세우려고 고심하다가 혹시 이것도 바이브코딩이 가능한가? 싶었다. 이상하게 네이버블로그나 다른 사이트에 글을 쓰기 싫었다. 그래서 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100메가짜리 소박한 무료호스팅 서버를 하나 분양받아서, 거기에 제로보드라고 역시나 그 시절 인터넷을 호령하던 오픈소스 계열의 웹보드를 설치해서 잘 쓰고 있던 중이었다. 제로보드가 php베이스의 굉장히 옛날 웹 게시판이라 소스코드 수정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챗지피티가 짜준 포커스아웃 경고창이 훌륭하게 동작했다.


나 컴공과 요 자랑하려고 이유를 잠깐 설명하면, php 자체가 SPA도 없던 시절의 html 호환을 잘 지키는 웹스크립트 언어인 데다가 html5로 넘어오면서, 간단한 컨트롤을 서버 부하분산을 위해 웹브라우저의 능력으로 커버 치는 체계가 잘 정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웹브라우저의 이벤트 오버라이딩이 가능해져서 스크립트 태그의 이벤트 컨트롤러가 php 코드 위에서 잘 동작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크립트 코드 추가 이후에, 내가 저장을 안 하고 웹브라우저를 끈다거나 백스페이스 버튼을 실수로 누르게 되면 정말로 나가겠냐는 경고팝업이 잘 뜨고 있다. 구닥다리 html호환을 맞추면서 지금의 보안체계마저 잘 구축한 공돌이 선배들 만세, AI세상 만세다.


다시 본업모드로 돌아와서... 성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번에 얘기할 그녀의 이름 이니셜이 H였다는 건 어떻게 기억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그 이름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내 뇌가 그 이름 맞아 이러고 있다. 이분은 아마 나우누리의 어떤 온라인 동아리에서 만났을 거다. 약간 혀 짧은 앳된 목소리와 작은 얼굴과 덧니가 기억나고, 사실 굉장히 인상적인 오피스룩의 투피스 착장이 실루엣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참 나도 이런 것만 기억나는구나. 무슨 글 쓰는 동아리였나 보다. 당시에도 공대생주제에 글 좀 써보겠다고 괜히 꼬부랑꼬부랑 말도 안 되는 글을 나우누리 게시판에 올렸고, 거기에 낚인 그분과 온라인으로 나우누리 쪽지를 이리저리 주고받았던 것 같다. 글쓰기라는 게 진짜 뇌근육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기억하려고 애쓰니까 그 시절 기억이 봄날 새순 돋듯이 조금씩 조금씩 움을 틔운다.


그때 오프라인으로 만났던 H는 사실 외모만 보면 내가 만났던 여자들 중에 최상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키도 168에서 170 사이는 되어 보였고, 결정적으로 얼굴이 작아서 언뜻 보면 연예인 느낌이 나기도 했다. 뭐랄까, 자기에게 달라붙던 똥파리 남정네들에게 지쳐있던 도중에, 내가 굉장히 신선한 똥파리 느낌이었을 거다. 지저분하지만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 분명히 내가 좋아하는 모습의 이성이 아니었는데, 나도 오프라인에서 한번 보고 혹해서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가려고 했던 거 같으니까.


오히려 어느 쪽이냐면, 이 분이 나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표현하는 쪽이었고, 역시나 내 인생에서 이런 느낌 받은 적 몇 번 없어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와... 나우누리에 그 문제의 게시판에 그녀가 쓴 글들이 몇 개 있는데 눈뜨고 못 봐줄 정도로 작문 수준이 처참했다. 맞춤법 다 틀린 건 둘째 치고라도, 단어의 사용이 상황에 맞지 않는 때가 너무 많았다. 비유법, 은유법을 쓴다고 썼는데, 글 보고 있으면 아. 나 너무 무식한데 드러내긴 싫어서 여기에 뜬금없이 이 형용사를 써요. 데헷~ 이런 느낌이었다.


그녀와 연락이 어떻게 맞아 처음 인사를 나눈 뒤, 덕수궁 돌담길을 말없이 같이 걷고 있었는데, 이때까지는 가로수 등불 빛의 별모양 아웃포커스가 아련한 드라마의 한 장면 이건만 그녀와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보면, 갑자기 여기는 병아리 옷 입은 애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덕수궁 유치원이 되어버리는 그런 웃지 못할 희극이랄까.


그리고 그때 느꼈다. 나는 대화 안 되는 여성과는 절대 사귈 수 없겠구나라고. 요즘 애들 눈이 높아서 결혼시기가 늦어진다고 하는데, 약간 그런 거와는 다른 느낌이라고 맘속으로 항변해보긴 하지만, 연애는 짧고 인생은 기니까 매번 이런 대화를 하느니 혼자 살고 말지라고 느낄 정도로 그분의 상식 수준은 처참하긴 했다.


K와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다 보면 자연히 쉽게 정리되는 온라인 만남의 장점으로 조금씩 만남이 뜸해지고 멀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모르겠다. 내가 어찌 잠깐 만나 느낀 나만의 깜냥으로 인간을 재단하겠냐 싶지만, 그때 그분의 외모에 혹해 만남을 계속하고 혹시나 인연을 이어 결혼을 했다면 나는 정말 정말 불행했을 거다.


그 뒤로 회사생활을 하며 정말이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보았지만, 그렇게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은 내가 피하는 게 최선의 방책임을 몇 번이나 쓴 경험으로 확인했으니, 그 당시 어렵게 그런 판단을 내렸던 나 자신을 두고두고 칭찬한다. 그 시절 그녀들의 기억을 쓰면서, 그때 그녀들과 인연이 계속되었으면 어땠을까 속으로 슬쩍슬쩍 상상해 보지만, 이분은 예외적으로 그런 상상 안 하기로 하고 한번 더 속으로 큭큭 웃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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