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연인을 지켜보는 타인의 맘으로
대학 4학년 2학기는 대학원으로의 진학을 결정한 이후에, 남은 전공 필수도 거의 다 들어놨던 굉장히 여유로운 학기였다. 그리고 대학의 마지막 수강신청에서 엄청나게 높은 경쟁률의 스포츠댄스 수강신청을 성공하고 말았는데, 대학교 4학년이 된 그때까지 제대로 된 여자친구를 만들어보지 못한 나의 한 맺힌 클릭질에 하늘이 감동한 거 아니었을까 회상해 본다. 그리고 설레면서 기다렸던 스포츠댄스 첫 수업 시간에 K를 만나게 되었다.
나 같은 숙맥을 위해서였는지, 스포츠댄스 수업에서는 한번 결정된 파트너는 바꾸지 않고 학기 끝까지 함께해야 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파트너였던 K와 반 강제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4학년으로 서양화과, 즉 미대생이었다. 왠지 미대생들은 날카롭고 섬세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는데, K는 시종일관 느긋한 모습에 말투마저 굉장히 느릿느릿했다. 내가 스텝을 밟다가 실수로 발이라도 밟으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는데 그 모습에서 언뜻언뜻 혹시 엄마가 미대생이면 저런 학생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머니는 미술에 소질이 있었지만, 그 당시 시골의 여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간호학교를 나와 나를 낳기 전까지 간호사를 하셨었다. 그 후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고, 누나 둘과 나를 키웠다. 간호사가 맞지 않아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었다고 그때를 회상하는 어머니는, 4년 터울, 2년 터울의 누나들에 이어 나까지 연달아 있었던 대학입시의 행군을 끝낸 뒤, 기어이 동네 미술학원을 등록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7년 뒤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여셨다. 이제 80이 다 되어가는 나이이신데도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즐겁게 그림을 그리신다. K는 그런 어머니 특유의 낙천적인 태도 어딘가가 닮아있었다고 아직도 기억난다.
스포츠댄스에서는 남자의 리드가 무척 중요하다. 남자의 오른손으로 여자의 등에 살포시 손을 대고 왼손으로는 여자의 오른손을 살짝 포개 잡은 뒤에 손의 힘과 방향을 잘 조절하여 여자의 스텝을 리드해야 한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K와 나의 거리를 조심스럽게 조정하며 슬로와 퀵 리듬에 맞추어 황홀하게 스텝을 밟다 보면 어느새 스포츠댄스 수업시간이 끝나있었다. 그리고 또 몸의 거리가 가까우면 어떤 경계가 사라지는 느낌이라, K와 편하게 친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남자친구는 있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걸 물어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2학기가 빠르게 지나갔고, 종강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처음에는 그렇게나 잘 맞았던 그녀와의 댄싱이 어딘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 막바지에는 스텝도 익숙해지고 해서 발을 밟거나 리드가 엇나가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좀 속상했다. 어딘가 멍하니 딴생각을 하거나 집중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던 K였다. 처음 배운 게 왈츠의 기본스텝이었고, 그다음에 배운 댄스는 자이브였다. 기말 점수 측정을 위해 교수님이 보는 앞에서 배운 대로 댄스를 춰야 하는데, 몇 가지 실수를 하고 굉장히 아쉽게 마지막 댄스가 끝났던 거 같다. 대학 때 들었던 대부분의 체육수업에서 A를 어렵지 않게 땄던 나였는데, 예상은 했지만 스포츠댄스 수업에서는 A를 받지 못했다.
졸업 후에 스포츠댄스 열풍이 잠깐 불어서 예능식의 경연대회도 방송에서 하고 그랬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전해주셨던, 춤은 상대방과 몸으로 대화하는 인간 본질의 움직임이라는 말이 화면의 댄서들에게서 온전히 느껴졌었다. K와 나는 그 점에서는 점수를 받을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티브이를 보는 내내 들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이제 다시는 K를 볼 수 없는 건가 아쉬워하며 마지막 안녕 인사를 준비하던 차에, K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굉장히 보고 싶은 미술 전시회가 있었는데 혹시 자기와 같이 가지 않겠냐고. 나는 기꺼이 같이 가겠다고 했고, 종로 빌딩숲 어딘가의 지하에 위치한 아담한 미술관을 방문했었다. 그 특유의 느린 말투로 그녀가 조곤조곤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는데, 미술관 방문도 처음이었고, 해설을 곁들인 감상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참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실 그거보다 더 큰 기억은 당연히 그 이후의 일이다.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 그 옆에 작은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약간 어두운 얼굴의 그녀에게 최근에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K야 라고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K의 표정을 보건대 미술관 문 앞에 서있던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임이 분명했다.
약간 당황하지만 그에 대한 원망과, 또 본인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느껴지는 기쁨과 그런 수많은 감정이 그녀의 눈에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당연히 '친구'라고 소개받은 나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피해 줬는데, 그제야 내가 스포츠댄스에서 B를 맞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순수하게 스포츠댄스를 추는 순간에서만 댄스의 순수한 즐거움과 감정으로 나와 호흡을 맞추고 그 즐거움을 자연스럽게 멋진 스텝으로 이어내던 K는, 남자친구와 뭔가 안 좋아지고 나를 다음 남자친구의 후보로 생각하면서 그 순수함에 감정이 끼고 스텝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던 거 아닐까.
원래대로라면 미술관을 남자친구와 왔어야 했는데, 그 순간에는 내가 있었고 그 복잡하고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던 차에 자기와 화해하기 위해 남자친구가 나타난 거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하고 복잡한 감정도 잠시, 이루 말할 수 없이 환하게 밝아지던 K의 얼굴은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기분 나쁠 수 있었던 잠깐의 대리 남자친구 후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그때와 비슷한 표정을 연애시절 와이프를 통해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불쑥 나타난 연인을 향해 함박웃음 짓는 여자의 표정처럼 보기 좋은 건 없는 거 같다. 여러분 모두 그때로 돌아가 지금 옆에 있는 연인에게 그 시절 무해했던 웃음을 지어주시길. 이 순도 백 퍼센트의 웃음은 그 어느 약보다 효과가 강력한 삶의 청량제임이 확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