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의 추억

이제는 없는, 그시절 순수했던 선물이 그리워서

by 원현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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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주변 없고 꾸밀 줄도 몰랐지만, 연애에 진심이었던 우리들에게 있어 좋아하거나 호감 있는 여자들에게 우리의 진심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부담 없으면서도 진심을 가득 담아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기 가장 좋은 날은 화이트데이였다.


밸런타인데이 때 기억 못 하고 지나갔는데 생각해 보면 초콜릿 못줘서 조금 미안한 감정이 있는 상태에서,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사탕 선물을 받고 감동해서 무너지는 그녀. 상상만 해도 이건 너무 완벽한 공식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는 그럼 어떤 선물이 가장 강력한 감동을 선사할 것인가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때 그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H가 갑자기 우리 사이에 쓱 끼어들어 말을 꺼냈다. 어? H가 이 자칭 연애 선수들의 레이스에 참전을 선언한다고? 모두가 주목을 할 수밖에 없었다. H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각진 턱과 큰 성량이 인상적인 친구였다. 아버지가 용달업을 하신다고, 그렇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라고 몇몇 과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담담하게 얘기하던 H가 기억난다.


그는 집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과외를 4~5개 하면서 대학 등록금을 자기 손으로 벌던 친구였는데, 특유의 성실함으로 과외하는 집 아이들의 성적도 올리고, 이에 만족한 부모님들이 다른 집을 소개해 과외자리가 끊이지 않던 그런 녀석이었다.

한 번은 과외 수업받던 여자애가 H를 향해 선생님 좋다고 치근덕댄 적이 있었는데, H는 고3이 공부해야 하는데 정신 못 차린다고 버럭 화를 내고, 그 집 부모님에게 알리고 자기가 과외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우리는 야이 미친놈아 그래도 꾹 참고 1년만 버텨서 우리 아름답게 사랑하자 이렇게 여지를 남겼어야지, 어떻게 그 좋은 기회를 날리냐며 타박을 해댔지만 진국 남자를 알아본 그 고3 여학생의 눈을 칭찬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우리는 모두 H의 얘기를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주목을 받은 그가 부끄러워하며, 자기가 고등학교 절친에게 배운 최고의 비기라고 알려준 방법은 다름 아닌 정성이 가득 들어간 초대형 사탕상자였다. 그게 뭐냐고 다른 친구들은 핀잔을 주었지만, 역시 H는 모르는 게 없구나 하고 감탄하며 걸려든 게 바로 나였다.


우선 핑크색 부직포와 노끈이 필요하고, 사탕은 어떤 것도 상관없는데, 사탕을 하나하나 부직포로 감싸고 노끈으로 양쪽을 다시 매서 사탕봉지를 다시 만든 뒤에, 그 사탕들을 큰 상자에 하나하나 나열해 붙여서 그걸로 다시 초대형 하트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사이즈는 진짜 커야 한다고 했다. 공대생답게 진짜 큰 사이즈의 치수를 모두 계산해놓고 있었던 그에게 감탄하며, 나는 그래서 그렇게 전해 줄 여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고 그는 수줍게 선물을 줄 그 애는 자기 고등학교와 조인트 동문회를 하는 근처의 여고출신 친구라고 했다.


과외로 시간이 없는 그 틈에 언제 또 마음에 여자 하나를 품었냐 하는 생각에 H가 기특하기까지 했고, 나도 미래의 그녀를 위해 한번 선물 연습을 해보자, 안 되면 그 친구 선물 만드는 거 도와주지 뭐 하고 생각했다. 화이트데이를 일주일 남긴 시점, 작업장은 우리 집이었고 H와 또 다른 고백의 희망에 들뜬 과친구 하나와 해서 셋이 의기투합해서 재료를 싸들고 와서 대망의 초대형 사탕상자 만들기 작업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뭔가 들뜬 H와 또 다른 친구의 얼굴이 신기하기도 하고, 나도 이런 거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괜히 나까지 설레어서 작업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만들어도 초대형 사탕상자는 사탕으로 가득 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거기에 부직포는 생각보다 탄성이 있어서 노끈으로 양쪽을 제대로 묶는 게 쉽지 않았다. 손가락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무 안 이뻤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정네 셋이서 초대형 사탕상자 2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게 그렇게 대단히 감동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작업을 하면 할수록 셋의 머릿속에 감돌았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남는 건 끈기 밖에 없다는 의지의 공대생들 아닌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고 다독였고, 또 효율의 공대생답게, 이번에는 작업을 분담하여, 노끈조, 부직포조, 데코레이션조로 나누어 차곡차곡 사탕을 모아, 기말 논리 회로 과제를 완성한다는 각오로 커다란 하트를 쌓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을까, 정말 볼품없을 것 같았던 사탕모양이 서서히 하트로 완성되고, 주위를 예쁜 색종이 둥지로 장식하니까 예상과 달리 결과물은 굉장히 멋져 보이는 사탕상자 선물로 변신을 하고야 말았다. 밤늦은 시간 말없이 선물공장을 돌리던 우리 셋은, 서로 얘기는 안 했지만 이 정도의 정성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녀는 정말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했고, 이 선물에 감동하지 않을 여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서로의 믿음의 눈빛에 취한 채로, 정성으로 완성된 선물상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본다면... 예상은 했겠지만,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H는 한동안 동문회 모임에 나가지 못했고, 또 다른 친구는 자신과 친구들의 정성이 눈앞에서 부정당하는 비극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는데 나는 한편으로 내가 제3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찌 사랑이 오랫동안 정성과 노력으로 풀 수 있는 수학문제가 아니냐는 사실에 오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예뻤던 그 사탕상자는 그 시절 아니면 결코 만들 수 없었던, 서툴렀던 우리 평범한 남정네들이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속의 바람으로 하나하나 엮은 순수한 열망과 정성의 결정체였다.

모든 좋은 것들을 돈으로 쉽게 얻는 요즘 세상에서는, 저런 정성 가득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거 아닐까. 말없이 사랑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정성이라는 탑을 쌓아 올렸던 우리들은 이제는 그때의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고, 모두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가 되어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다. 이번에 돌아오는 화이트데이 즈음에, 지금은 대기업 상무가 되어있는 H에게 오랜만에 연락해서 그때의 사탕상자는 아직도 너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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