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때만 해도, 첫 직장이 교도소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학생만 10년인 생활을 마치고 공중보건의사로 교도소에 오며, 난 1500명의 주치의가 되어버렸다. 초보 의사의 이야기를 선배들에게서 듣고, 책에서도 읽었지만 현실에서 맞이했을 때의 긴장감, 누군가의 생명이 내 결정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는 책임감은 잠을 설치게 할 정도였다.
매일 평균 80명의 진료를 보고, 응급환자처치를 하며, 점점 경험이 쌓여갔지만 어리숙함은 곳곳에 묻어났다. 상처 봉합은 모형에만 해보았는데, 이곳에서는 예고 없이 실제 환자가 들이닥쳤다. 자해로 인한 두피 열상, 같은 방 재소자와의 싸움으로 눈썹 찢어짐과 같이 교도소가 아니면 보지 못할 이유로 환자들이 진료실을 찾았다. 그러면, <하얀거탑>속의 외과의사라도 된 것처럼 의연히 봉합을 수행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별 거 아니야.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되.’ 를 마음 속으로 계속 외치며 보이지 않는 떨림을 애써 감췄다.
환자도 의사도 서로에게서 도망갈 수 없는 이 공간은, 애증의 공간이다. 어떻게든 바깥에 나가보려는 재소자들 사이에서 진짜 환자를 발견해 내는 것은 오롯이 의사의 몫이다. 열과 성으로 진료를 보아도 꼬투리를 잡고 인권위원회와 법원에 의사를 고소하는 재소자들과, 이미 이런 모습에 갈고 닦여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교도관들 사이에서, 재소자들도 다 같은 환자로 대하겠다는 초심을 유지하는 것 또한 의사의 몫이다.
하루는 오전 7시 13분 경 50세 남자 재소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맥박 및 호흡은 있으나 의식이 없고, 가슴을 치고 꼬집어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뇌경색 또는 뇌출혈을 의심하고 외부 응급실로 후송하였다. 하지만 CT, MRI 까지 다 찍었지만 특이사항은 없었고, ‘꾀병’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고 복귀하였다. 복귀하고도 말은 여전히 하지 않고, 걷는 중간에도 자주 넘어지는 연기를 하는데, 남우주연상 급이었다. 좀 더 강하게 통증 자극을 주어 꾀병을 찾아 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에 그날 하루 종일 부끄러웠다.
이런 사건들이 나를 잠식하지 않도록 매일 기원한다. 그렇기에 재소자 Y를 돌보는 일은 Y뿐 아니라 나를 돌보는 과정이다. 교도관들과 다른 재소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선생님과 본인 말고는 Y가 살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 의식이 저하되고 열이 난다는 연락을 받고 교도소에 들어간 나는 Y를 외부병원에 보낼지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지난번, 의식이 없다고 나에게 보고도 없이 외부병원에 나갔던 Y는 근거 없는 진단명과 함께 심각한 근위축과 욕창만 얻어왔다. 똑같은 일이 벌어지길 원치 않았다. "밖으로 빼시죠"라 말하고 3분만에 상황을 종료시킬 수도 있었지만 알량한 자존심과 책임감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불명확한 열의 원인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주사를 놓고, 도뇨관을 교체하고, 귀의 염증을 처치하고, 가래 제거를 위해 한 시간 넘게 등을 두드리고, 밤새 상태를 모니터링하며 깨어 있었다. Y의 상태가 안정되고, 아침 교도소 문을 나와, 누군가에게는 잔인하기만 한 교도소 벽을 따라 걸으며 곱씹었다.
안다. Y가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란 걸. 안다. Y가 감사하다고 찾아올 리 없다는 걸. 안다. Y가 교도소 직원들께 부담이 된다는 걸.?하지만 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존재란 걸. Y도 사람이라는 걸.
아직 뇌경색인지 치매인지도 확실치 않은 70 먹은 어린애 Y는 정신이 보다 또렷해지고 기력을 되찾고 있다. 다리근육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시키고 있고, 분명한 호전추세가 보인다. 욕창은 4기, 언제 다시 상태가 악화될지 모르지만, 난 안다. 내가 해야 될 일을 해야 된다는 걸. 어느덧 말이 많아진 Y가 진료를 받고 가며 “수고했어요”라 말하는 한마디에 의사의 초심을 되찾는다.
누군가는 죄인에게 최소한의 의료만 제공하면 족하지 않냐고 말한다. 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 격언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초보 교도소 의사는 오늘도 죄수복 뒤의 사람을 바라보며, 가능한 한 미소 지으며, 묻는다. “수번이 어떻게 되시죠? 어디가 불편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