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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은시인 Jan 05. 2019

질병유발사회에서 치유공동체로의 혁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무섭지 않아?” 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사 생활을 시작한 제가 주변 친구 및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들은 말입니다. 솔직히, 시작하기 전엔 조금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막상 한두 번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해보면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끄러운 점은 이태원 트랜스젠더 바 옆을 지나면서 친구에게 제가 했던 말 또한 “무섭지 않아?”라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편견과 경계 심지어 두려움이 앞섭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삼성반도체 직업병 환자, 세월호 참사 생존자, 성소수자, 교도소 재소자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관심보단 경계가 앞서기도 합니다. 말하지 못하고 꾹꾹 참아왔던 상처를 힘겹게 길거리 시위 팻말 하나로 표현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손가락질합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이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을 조명합니다. 그들이 단순히 ‘익숙하지 않음’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아프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그리고 유전자 변형이 질병을 일으키듯, 한 사람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어떻게 그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에게 그 아픈 존재들과 같이 길을 걷자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삶의 행보가, 한 사람의 글이 다른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합니다. 김승섭 교수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제 삶의 방향을 바꾼 책입니다. 어느 지역에서 공중보건의사로 복무해야 될지 고민한 끝에 전 교정시설을 지원하였습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지적한 건강문제를 일부분이라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제게 같이 길을 걷자고 보낸 초대에 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복무하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과가 보이지 않는 예방적 사회복지에 소홀해왔습니다. 사람들이 아프게 되는 근본적 이유를 찾기보단 아프다고 오는 환자를 치료하기 급급했습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말하듯 교육과 가정의 부재, 가난, 외로움이 스며들어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질병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교도소는 이 ‘아픔과의 전쟁’에서 최후의 보루와 같습니다. 열악한 사회경제적 배경이 아픔을 만들고, 동시에 역으로 아픔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짓고, 때로 범죄로 이어지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라는 책 속의 말처럼 말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교도소는, 고혈압과 당뇨병이 왜 위험한지 알려주기 전에 고혈압약과 당뇨약을 먹입니다. 이들이 가진 정신과적 문제를 알려주고 적절한 정신보건프로그램을 제공해주는 대신 수면유도제를 주어가며 출소일 까지 버팁니다. 이는 아픔이 길이 아니라 도돌이표가 되도록 하는 폭력적 방법입니다.

사회에 폭력성은 만연합니다. 병무청 신체검진장소에서 목욕가운과 같은 옷을 걸치고 있던 트랜스젠더 여성분을 보았을 때 충격은 잊히지 않습니다. 그분이 마치 동물원의 구경거리처럼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에 분노했고,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고환적출수술을 받아야만 현역입영처분을 면하는 우리 사회는 강압적이며 폭력적입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지적하듯이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만행하는 한국사회는 아픔을 조장하는 사회입니다.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섬세함과 포용력이 사회 전체에 필요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계속해서 강조한 바와 같이 이것이 우리 모두 건강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데이터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호소하기 보단 누구나 볼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보여줍니다. 단순히 전공의들 근무시간이 너무 길어 힘드니까 근무시간 좀 줄여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공의 수면시간에 따라 아차사고 발생률이 어떻게 되는지 그래프를 제시합니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속에서 해고가 어떻게 해고노동자들의 삶을 붕괴시켰는지 수치와 논문으로 증명합니다. 이 책이 힘을 가지는 또 다른 이유는 저자가 이 책을 쓰고 이러한 연구를 하는 이유가 이력서에 한 줄을 추가하기 위함이 아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에서 전문가로서 어떻게 힘이 될 수 있는지 저자가 몸소 보여주기 때문에 이 책엔 감동이 있습니다.

이 책이 인지하고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혁명’이 한명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역설하듯 사회적 원인에 대해선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며,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건강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편협과 차별의 늪에서 우리 스스로를 자해하며 질병유발사회를 만들기 보단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치유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일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안에서 얼마나 이기심을 뛰어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라는 책 속의 말은 제 마음속에 깊게 공명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치유공동체로 향하는 길 위, 한명의 혁명군이 되어 -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함께 그 비를 맞아가며 – 관심과 힘이 필요한 그리고 함께 서줄 사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분주한 발걸음을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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